바람의 춤꾼
바람의 춤꾼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06.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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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벌떼처럼 달려드는 왜군의 추격을 피해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던 광해군은 허기에 지쳐 거의 탈진한 상태였는데, 피난 중인 백성이 지어준 밥 한 그릇을 엉겁결에 받아먹고는 달리 보답할 것이 없어 고마운 마음에 춤을 추었습니다. 영화 `대립군(Warriors of Dawn, 2017)'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었습니다. 오래전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 2000)'에서 보았던 루이 14세의 춤에는 민초(民草)들의 고단한 삶이 겹쳐지진 않았거든요.

굳이 영화 이야기를 떠나서라도, 이 시대에도 다른 사람의 군역(軍役)을 대신했던 대립군(代立軍)처럼 살아온 춤꾼이 있더군요. 그의 이름은 이삼헌입니다.

차를 몰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엔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는 바람이었지만, 유월 한낮의 더운 공기에 달아오른 육신을 달래줄 만큼 시원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요. 춤꾼 이삼헌을 15년 동안 카메라로 옮긴 영화 `바람의 춤꾼(Dances with the Wind, 2017)'을 상영하고 있는 대전아트시네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무대 위 커튼에 노란색 실로 새겨진 전화번호였습니다. 22-8×××. 30년도 더 돼 보이는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겨져 있더군요. 전신(前身)이 동보극장이었던 거죠.

“이 오래된 작은 극장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군처럼 취급 받는 간난(艱難)한 다양성 영화의 현실만 또다시 확인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의욕이 앞서버린 결과물을 맞닥뜨려 괜스레 심경만 복잡해지진 않을까?” 적잖이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감독이나 배우 같은 영화 관계자와 관객과의 대화인 GV(Guest Visit)를 놓칠 순 없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고 싶다는 최상진 감독이 주목한 이삼헌의 춤은 거리의 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벅투벅 밟고 지나간 거리에서, 이젠 찾는 이들도 별로 없는 휑한 거리에서, 때론 녹슨 철로로 변해버렸거나 억압 받는 자의 영혼의 숨결마저도 옥죄려 했던 수용소의 철문 앞으로 이어진 거리에서 진혼(鎭魂)의 꽃잎을 흩뿌려대는 춤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키는 흠결 없는 의식(儀式)이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먼 산이요./꽃 피고 잎 피는 그런 산이 아니라/산국 피고 단풍 물든 그런 산이 아니라/그냥 먼 산이요.//꽃이 피는지 단풍 지는지/당신은 잘 모르는/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그리운 먼 산이요.//꽃이 피는지 단풍 지는지/당신은 잘 모르는/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그리운 먼 산이요.”

김용택의 시에 범능 스님이 곡을 붙인 `먼 산'이란 노래를 허공에 화살을 쏘아 보내듯 시시때때로 부르기도 하는 이삼헌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웠으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 했다”는 말을 남긴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절한 용기의 끝판왕을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프니까 춤을 춘다는 이삼헌은 이 시대의 암울했던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할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왔네. 후회는 아니고….” 그의 혼잣말이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처럼 점점 더 또렷해지더군요.

영화를 제작한 박미경 대표의 말처럼 많은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허리에 수건을 차고서, 거리에서 춤을 추느라 까매진 이삼헌의 맨발을 닦아주고 싶군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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