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되어야 할 농민문학의 선구자 이무영
재평가되어야 할 농민문학의 선구자 이무영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6.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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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명철

일제 강점기 고단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만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농민문학의 선구자가 있다. 바로 우리 고장 음성 출신인 이무영 선생(본명 이갑용)이다.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 가면 선생의 생가터가 남아 있고,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선생은 한말 의병들의 봉기를 피해 음성으로 피난을 왔던 시골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차남으로 1908년 1월 14일에 태어나 6살 때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문학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자신만의 더 큰 꿈을 키우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일본 세이조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일본작가 가토의 집에서 기숙하며 4년간 문학수업을 받았다.

19세 때인 1926년에 첫 장편소설인 <의지할 곳 없는 청춘>과 <폐허의 울음>을 간행함으로써 소설가로서 출발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소학교 교원, 잡지사와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많은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한국 최초 희곡 현상 공모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로 당선되었다. 1933년에는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등과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문학 주간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반역자>(1931),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1932), <루바슈카>(1933), <농부>(1934) 등이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무영 선생의 작품의 저변에 흐르는 분위기가 아나키즘적인 저항의식이라고 문학가들은 평한다.

이것은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던 카프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무영은 오래전부터 흙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실천에 옮긴 것은 1939년이다.

신문사 기자를 그만두고 경기도 군포 근처인 궁촌이라는 곳으로 귀농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제1과 1장>,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하면서 농촌소설의 선구적인 길을 열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고,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숙명여대와 단국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4·19 혁명이 한창이던 1960년 4월21일 52세의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소재 천주교 혜화동 교회 추모 공원에 있다.

선생의 고향인 음성읍내 설성공원에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곳 민속박물관 2층에 전시실에는 일제암흑기와 한국전쟁 수난기에 농민문학을 순수문학으로 정립한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생전 집필하신 소설 및 자필 노트 그리고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석인리 생가터에는 표지와 흔적이 남아 있다. 1994년에는 이무영 선생을 추모하는 `무영제'가 제정되었고, 2000년부터 동아일보사 주최로 `무영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한평생 붓 기울여 농민의 삶 그리셨네, 흙에 사는 그 보람을 모두에게 일깨웠네, 이 나라 현대문학에 새밭을 일구셨네, 토박이 농사꾼과 한 모습 하셨었네, 그 푸짐한 마음씨도 흙 내음을 풍겼었네, 세월이 야박하오매 더더욱 그리 웁네”라고 노래한 구상 선생님의 추모송이 들리는 듯하다.

석인리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서 한국 문학에 끼친 선생의 업적과 함께 일제 치하 치열하게 살아오신 삶에 경의를 표하고, 급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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