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소나무숲길에서
금강소나무숲길에서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6.2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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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유월의 짙은 녹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왜 우리는 아메리카합중국을 아름다운 나라 美國으로 표기하는가. 일본이 米國으로 쓰는 것에 비해 은근한 부아가 끓고,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여전히 지나친 사대 종속의 무리에게 혀를 차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하다가 이마저도 지쳐버린 채 홀연히 길을 나선다.

경북 울진에 있는 금강소나무숲길은 찬란하다.

죽변항에서의 오징어와 골뱅이의 쫄깃하고 짜릿한 식감, 낯선 민박집에서의 구수한 된장 냄새를 머금고 깊은 산 숲길 13.5km를 걷는다.

우리나라 숲길 가운데 산양이 가장 많이 사는 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지난 2010년 국비로 조성한 1호 숲길이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소나무가 앞다퉈 서로 자태를 뽐내는 이 길은 완전 예약제로 탐방을 허락한다.

금강소나무는 금강산으로부터 경북의 울진과 봉화, 영덕, 청송 일대에 자생하는 나무로 껍질이 유난히 붉고 줄기가 곧기로 유명하다. 춘양목, 또는 황장목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나무들은 나이테의 간격이 좁아 결이 곱고 단단해 예로부터 궁궐 등을 짓는 데 많이 사용됐다.

금강소나무는 곧게 자라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흔히 보는 소나무와는 달리 여러 나무와 공생한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랄 수 없는 배타성의 꼬불꼬불 굽은 소나무의 상식을 깨트리고 더불어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은 금강소나무가 자라면서 제 스스로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莊子)의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볼품없이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여 잘리지 않고 오래 남아 큰 나무가 되고 산을 푸르게 한다는 말은 어딘지 상생과 소통 없이 제멋대로 살아남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느낌이 든다. 살아남아 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구부러지고 다른 나무를 버티지 못하게 하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 더 조화롭다. 울창한 숲길을 7시간 동안 걸으며 산에게서 배웠다.

여름 산에는 유난히 하얀 꽃들이 많다. 짙푸른 녹음과 대비됨으로써 나비와 벌 등 곤충들의 눈에 잘 뜨이게 하려는 본능이 숨어 있다. 보랏빛 고운 산수국의 경우 꽃 주변에 하얗게 꽃잎이 아닌 꽃잎을 만들어 유혹하고, 개다래나무는 아예 잎사귀 아래 꽃으로 이르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초록 잎을 하얗게 변신한 다음 수정이 이루어진 뒤 다시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비틀어 보이고 추악해 보이는 나무가 일찌감치 뿌리째 뽑혀 좁은 화분에 갇혀 지낼 수도 있고, 곧 잘려나갈 미끈한 몸매의 금강소나무가 더불어 숲을 이루며 숲길로 우리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봇짐이거나 등짐에 소금이며 생활용품을 지고, 이며 산길을 넘나들었던 보부상의 옛길을 따라 청정한 숲 속을 걷는 금강소나무숲길에서, 정작 나는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머릿속의 복잡함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깊어 가는 여름 한낮 숲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잔뜩 찌들었던 몸과, 그동안 마구잡이로 섭취했던 온갖 것들의 노폐물을 원 없이 쏟아낸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고라니며 멧돼지와의 뜻밖의 조우는 짜릿했으며, 그 와중에 저 산짐승들과 모처럼 숲길을 찾은 나 사이에 누가 주인인가를 생각하는 일도 부질없기는 하다.

고단했던 보부상들의 삶의 애환과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는데 앞장섰던 보부상들 사이의 모순, 그 역사의 아이러니와 시름 깊어지는 가뭄에도 명랑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 어쩌다 나는 기어코 정상에 올라야 하는 등산보다 숲길을 걷는 일에 매료되었는가.

생각에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유발 하라리의 촌철살인의 한 마디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호모 데우스 中>를 떠올리며 되돌이표를 찍는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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