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국군 최초의 승전보 음성 감우재 전투
6·25전쟁 국군 최초의 승전보 음성 감우재 전투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6.22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 김명철

6·25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가슴 아픈 사건이다. 1953년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6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의 불씨가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북한의 정권은 반드시 타도할 대상이지만 북한의 주민은 같은 민족으로 품어야 할 존재라고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고 말을 한다. `통일'과 `안보'이 둘을 어떻게 교육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해야 할까? 고민하며 6.25를 다시 맞이한다.

6.25 전쟁이 일어나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형편 무인지경으로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던 안타까운 상황에서 국군이 최초로 승전보를 날렸던 곳이 바로 음성 감우재 전투였다. 당시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승전보를 알린 음성지구 전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6·25전쟁 당시 감우재에서는 4차례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5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부근에서 북한군을 포위해 섬멸하였다.

7월 6일과 7일, 국군은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여 무극리를 탈환하고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여 부용산과 무극리 남쪽 백야리 351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전에 대비했다.

7월 8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서부에서 이동해 온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북한군 15사단 병력이 남하해 오자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감우재(기름고개)에서 적 1개 중대를 섬멸하고, 또다시 공격해 오는 2개 중대도 격퇴하였다.

7월 9일,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재차 공격해 오자 제11연대 제2대대는 감우재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2707명을 사살하였고, 170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한 각종 포 24문, 박격포 7문, 차량 65대, 장갑차 7대, 기관총 55정, 소총 1,187정, 무전기 4대를 노획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감우재 전투에서 국군은 71명이 전사하였고 11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감우재 전투를 포함한 음성지구 전투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군과 국민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현재 충북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1-1 일대에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무극전적국민관광지가 조성되었고 2003년 11월에는 감우재 전승기념관을 개관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올해도 일요일에 6·25를 맞이한다. 이번 6·25에는 감우재전승기념관을 꼭 가봐야겠다.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의 국군과 북한군의 군 장비·보급품,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과 생활 도구, 전쟁의 참상 등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목숨으로 싸운 장병들의 공훈을 기리고 싶다.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세워진 이 기념관을 세운 뜻을 살리는 6.25가 되었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