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과 고랑
이랑과 고랑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 해설가>
  • 승인 2017.06.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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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안상숲

가뭄이 너무 심합니다. 길엔 흙먼지 풀풀 날리고 밭작물은 겨우 숨만 잇고 있는 듯 애처롭습니다. 그럼에도 겨우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푸른 생명들이 그새 뿌리를 내려 튼실해졌습니다. 줄 맞춰 심어진 초록의 벼 포기 위로 발 없는 바람이 냅다 내달립니다. 바람에 이리저리 춤을 추며 벼들이 자라납니다.

밭에는 고랑과 이랑이 줄 맞춰 가지런히 그어져 있습니다. 그 모양이 공책 같습니다. 하도 예뻐서 한참을 서서 보기도 합니다. 저 고랑에 어떤 씨앗이 심어질까요? 그 씨앗이 피울 꽃들과 열매들이 궁금합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농부들의 씨 심기가 시인들의 시 쓰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 공책에 한 글자씩 써내려간 시어들이 주는 감동과 마찬가지로 이랑 위에 심겨진 씨앗들이 싹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감동.

아버지는 평생 농부셨지요. 일을 마친 아버지의 빈 지게에는 빈 점심 밥그릇과 꽃 한 묶음이 실려 있었어요. 내 기억 속에 이 장면이 왜 이렇게 각인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지게 위에서 출렁거렸던 꽃다발이 떠올라요. 신기하게도 지게를 진 아버지는 흑백의 초라한 실루엣으로 희미해졌는데 지게 위에 실린 꽃만 화사하게 제 색을 갖추고 있어요. 아마 제가 조금씩 미화시켜 기억을 수정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지게에 실린 꽃들을 떠올리면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고단했을 노동이 안쓰럽게 짐작되기도 하지요. 기억 속의 아름다움엔 늘 슬픔이 묻어 있어요.

아버지의 산 밭에 따라간 적도 있었지요.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 고개를 넘으면 훤하게 보이는 밭 자락. 그 한 가운데 커다랗게 쌓아놓은 돌무덤이 있었고 그 돌무덤을 빙글 돌아 비탈진 밭에 그어진 그 부드러운 줄. 이랑과 고랑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꽤 솜씨 좋은 농부셨어요. 아무렇게나 그어진 듯한 이랑과 고랑이 구불구불 보여주는 등고선. 이랑 위에 새싹이라도 돋아나면 그 파릇파릇함이 주는 기대감으로 밤낮없이 오르락내리락하셨던 그 산 밭. 지금은 아예 그 산밭자락에 누워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바람으로 돌아가시고도 남았을 만큼 아주 오래된 옛날 옛적….

농부의 씨 심기가 그 딸의 시 쓰기보다 귀중한 일임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빈 공책에 줄 맞춰 써내려가는 시어들이 아무리 가슴을 울려도 구불구불하게 그어진 이랑 위에 심겨진 아버지의 씨앗보다 더 아름답기는 어렵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씨앗이 흙속에서 숨을 토해내며 싹을 틔우는 그 순간, 생명을 시작하게 하는 농부. 아름다운 시인 농부….

지금은 트랙터가 반듯하게 그어놓고 시커멓게 비닐을 씌워 놓았지만 이랑과 고랑으로 금 그어진 밭은 여전히 아름다워요. 꼬물대며 올라온 새순이 엊그제인데 이런 가뭄에도 옥수숫대 키 큰 것 좀 보아요. 한 줌 움켜쥔 흙을 절대 놓지 않는 뿌리는 가물수록 깊어져요.

잘 알고 지내는 젊은 농부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가 어느 날부터 기도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제발 비 좀 내려주세요.'바짝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 논바닥처럼 갈라졌어요. 이제 곧 장마철. 고랑 넘치도록 비님 내려 농부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기도하는 일이에요. 하늘과 땅과 바람과 비에 기도하고 기도해야 하는 일이에요. 이랑과 고랑에 한평생 심겨진 씨앗이 제 공책에서 시로 피워지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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