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국회의원님
존경하는 국회의원님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6.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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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국회의 행사 때 듣는 `존경하는 ○○○ 의원님'이라는 호칭이다. 국민 정서는 뭐가 그리 존경받을 만해서 `존경하는'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끼리끼리 올려주는 것이 `가관'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래, 너희만 잘났냐'는 반문도 있고, `놀고 있네'라는 탄식도 있다.

그러나 `존경하는'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 좀 해보고 싶다. 국회의원들끼리 때론 의견이 달라 감정이 한창 격해져 있는 상태에서도 굳이 `존경하는'이라는 관용구를 붙이는 까닭이 뭘까?

말이라는 것이 그렇다. 말도 술 같아서 한잔하면 한 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중독성이라고나 할까, 자극성이라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을 전공하는 교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나, 고민이 있어요. 나는 왜 한 잔 먹으면 또 한 잔 더 먹으려 들지요? 적당히 그만하지 못하고 자꾸 마시지요? 술이 술을 먹는 경우는 왜 생기지요?'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자극이지요. 쾌락의 자극이라는 것이 자꾸만 커져요. 늘 조금 더 한 수 위를 찾게 되지요.'

욕망은 끝이 없다는 이론이다. 아니, 확대된다는 이론이다. 명예와 같은 관념적 욕망도 그러할진대 육체적 욕망이야 당연하겠다. 그런데 욕망만이 아니다. 언어도 그렇다. 욕을 해 버릇하면 더 자주 하고 싶고, 더 세게 하고 싶어진다. 자극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 욕만으로 시원하지가 않다. 더 쌍욕을 해야 가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나 똬리를 틀고 있는 마음속 가려움은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욕은 많을수록 좋고 셀수록 좋다.

초등학교 때다. 욕이라고는 못해보다 전학을 갔더니 그 동네 아이들이 엄청나게 욕을 잘하고 있었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동화되려는 애잔한 마음도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그 반에서 욕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욕쟁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걸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사고는 집에서 생겼다. 나를 도둑으로 취급하던 웬 아저씨를 피해 집으로 오면서, 그만 어머니 앞에서 욕이 나오고 만 것이다.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욕 두 마디 때문에 두들겨 맞은 것은 평생 잊지 못한다.

난 정말 억울했다. 그 아저씨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입장은 단호했다. 모든 것과 상관없이 네 입에서 욕 나오는 것은 못 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욕쟁이라고 친구들이 불러주는 영광을 포기해야 했다. 학교에서 쓰던 말은 어느 순간 집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욕을 안 써도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은 이미 많았다.

요즘은 일부러 자극적으로 보이고자 가끔 쓰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때 일이 떠올라 움찔한다. 상황과 상관없이 내가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서로 욕하고 싶지만 그 마음을 누르기 위해 `존경하는'이라는 형식적인 어귀를 붙인다는 것을. 오만한 자기의 심리를 억누르고,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방도라는 것을. 존경하지 않을수록 존경한다는 말을 붙여야 한다는 것을.

`존경하는'의원님께 여쭌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에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로 바뀐 지 오랜데, 혹 증인이나 청문당사자에게도 이런 수사를 쓸 용의가 있으신지?

`존경하는 증인님', `존경하는 후보님'이 아니더라도 `친애하는'정도는 쓸 수 있으신지?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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