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의 사설
촌놈의 사설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6.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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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이따금 고향 꿈을 꾼다. 아슴푸레한 그날들을 꿈에서 만난다. 꿈에서도 꿈인 걸 알아챌 때도 있고 생시인 듯 푹 빠질 때도 있다. 깨고 나면 아쉬워서 그 꿈길을 되짚어 가본다. 아카시꽃 만발한 들녘을 지나다가 불현듯 유년의 시간을 되짚어 가보았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랩.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지.

- 동요 `고향땅' -

도시로 떠난 촌놈들에게 이 노래는 망향가가 되었다.

한번 부르면 가슴에서 뻐꾸기가 울고 또 한 번 부르면 눈시울이 젖었다. 해가 저물면 아이들이 소를 몰고 오는 풍경이 떠오르고,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꽃도, 나뭇가지에 퍼질러 앉아 종일토록 울어대는 뻐꾸기도 생각났다.

어떤 날은 청아한 노래 같고 어떤 날은 궁상을 떨어서 푸념 끝에 나오던 김서방댁 울음 같았다. 아카시꽃은 지금도 피고 지고 향기 여전하다. 뻐꾸기 소리도 변함없이 봄을 누비지만 귀밑머리 여자아이는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향수에 젖는다.

유월이 오면 아카시 꽃잎은 바람을 타고 흰 눈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가는 봄의 화려한 피날레다. 꽃잎은 설레는 가슴으로 냇물을 따라 드넓은 세상으로 떠났다. 머릿속이 영근 오빠가 꿈을 찾아 버스에 오를 때처럼... 등잔불이 막을 내리던 날 산골의 밤은 백야처럼 신비로웠다. 오빠가 만난 세상도 흘러간 꽃잎이 만난 바다도 그랬으리라.

바야흐로 소몰이꾼들이 소를 몰고 산을 오르는 계절이다. 동생은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소를 몰고 나선다. 소년 장정이 제 몸무게보다 몇 배는 더 나가는 누렁소를 부리는 모습은 당찼다. 총총걸음으로 올라서 고삐를 풀고 엉덩짝을 툭 치며 돌아섰다. 혹, 재너머 멀리는 가지 말라고 다독이는 소리다. 아이들은 해거름에 소를 찾아 산으로 올랐다. 그 시간이면 습관처럼 산마루에 소들이 모여들고 아이들은 한판 왁자한 놀이에 빠졌다.

해가 기울면 산허리를 돌아 소를 몰고 오는 행렬이 이어진다. 멀리서 보면 대장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례자의 행렬처럼 장엄하다. 워낭소리가 길을 잡고 작은 손으로 조율하는 잔잔한 평화는 노을 아래서 눈부시다. 묘한 신비로 따라오던 노을이 천천히 스러지고 땅거미가 내리면 육중한 몸을 누인 산등성이의 거친 호흡도 잦아들었다.

늦은 밤 침묵하는 산 위로 별똥별 하나가 떨어진다. 누군가 또 하늘나라로 갔나 보다. 그 밤 칠흑 어둠이 비밀스런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동생이랑 고모네 토마토 밭에 살그머니 기어들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소리가 잎사귀를 흔들고 틈새로 보이는 하늘에선 별이 쏟아졌다. 알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와 철퍼덕 누웠다. 알싸한 풋내가 코끝으로 몰려오더니 그날 이후 추억의 향기로 각인되었다.

고향은 영영 나이를 먹지 않으려나 보다. 늘 토마토 풋내처럼 알싸한 유년의 향기로 찾아온다. 양수의 바다에서 누렸던 생애 최고의 평화처럼 다시는 못 올 것에 대한 그리움을 향해 목마른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난다.

그리움이 이유였다.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죽자고 늘어놓는 이 촌놈의 사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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