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 실직의 공포를 느껴본 적 있나”
“우리가 언제 실직의 공포를 느껴본 적 있나”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6.20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 정규호

월요일이 두려운 시절이 있었다.

직장인들의 `월요병'마저도 한없이 부러웠던 시절. 월요일이 다가오는 일요일 저녁부터 평정심을 상실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휩싸여 심장은 물론 온몸이 떨리던 암흑의 시절.

어찌 어찌하다 실직의 상태에 놓이게 된 여러 차례의 내 처지는 참담했다. 누구나 제 할 일을 위해 건강하게 집을 나서는 월요일은 실직으로 백수가 된 나는 질식할 것 같은 모진 병이 더욱 깊어져 생사를 기약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아내 외의 가족에게는 실직 사실을 숨기고 몰래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시절. 도서관마저 휴관하는 월요일이 되면 자식들에게 들통날까 하는 두려움과 갈 곳이 없다는 서러움이 겹치면서 분노와 절망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차례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다.

“우리가 언제 한 번 실직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몸담은 조직이 도산할 것이라고 걱정해본 적이 있습니까? 장사하는 분들의 어려움이나 직원들 월급 줄 것을 걱정하는 기업인의 애로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 15일 취임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취임사를 듣고 옛일이 떠오르며 울컥해진다.

`청년 네 명 중 한 명 사실상 실업상태'로 집계되는 참혹한 현실이 2000년 이후 최고의 실업률로 기록되면서 “우리는 지금 한 세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서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일자리, 즉 돈벌이의 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치명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와 사회의 정책을 만들고 그 일을 맡아나가는 정부와 공직사회에서 아직 이처럼 솔직한 자기반성을 듣지 못한 채 무작정 버티는 것으로 살아왔다.

`철밥통'으로 상징되며, 어지간해서는 일자리를 잃을 수도, 또 어쩌다 조직 자체가 궤멸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져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직장이 사라지는 일은 꿈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집단.

그 공직사회가 책임져야 할 국민 개개인 삶의 위기 극복을 위한 처방은 그러나, 여태껏 제대로 된 성찰이나 반성과 고통의 경험도 없이 `책상 위의 정책'이거나 `현장과 유리된 정책'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렇다고 일부러 실직을 경험하게 하거나 오랜 실업의 고통을 겪어 온 이들만이 일자리 정책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공직사회의 고용과 관련된 룰을 깨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세상이 이처럼 훈훈한 기운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그리고 회사 경영이 힘겨운 이들에게는 서슴없이 도와줄 수 있는 열정적인 마음을, 자영업을 하거나 체불임금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한마디로 휴머니즘이 충만한 공직사회였으면 좋겠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솔직한 자기 고백과 더불어 사람(국민)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서려는 따듯함이 담긴 장관 취임사의 면면들만 봐도 그저 뿌듯하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무엇이 되겠는가. 그리고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언제 하겠는가.」2000년 전 유대교 현자 힐렐의 아포리즘에는 `나'에서 비롯되는 `우리'와 주저하지 않는 실천을 지금 세상에도 똑같이 권장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