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기우제와 국민주권
인디언 기우제와 국민주권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6.13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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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농사로 연명하던 인디언 부족 호피족의 기우제는 유명하다.

항상 부족한 강수량으로 모랫바람이 몰아치는 척박한 사막의 땅에서의 농사는 자주 부족의 생명을 위협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건조한 땅에도 이들 부족이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신통력이 있다. 그 영험함은 그러나 오로지 `비가 내릴 때까지'기우제를 계속하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에서 비롯된다. 얼핏 평범한 이야기로 들리겠으나 이런 간절함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진리가 아니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그런데 세상이 참 많이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런 탈바꿈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이며 적폐의 현상을 심각하게 경계한다.

지난해 가을과 겨울, 그리고 해를 바꾸어 봄이 찾아오기까지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숱하게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 얼마나 간절한 외침이었고, 또 얼마나 가슴 저린 뜨거움이었나.

그리하여 마침내 되찾은 새로운 세상.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 국민과 주권, 즉 주권재민의 숭고한 뜻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공공연하게 파탄을 위협하는 `정국(政局)'타령만 남아 국민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정국은 정치의 국면, 혹은 정치계의 형편을 뜻한다. 국어사전에 뚜렷하게 적혀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를 외치면 완벽한 정권교체와 적폐청산을 다짐했던 촛불의 장엄함은 불현듯 무시되고, 철옹성 같은 당리당략만이 판을 치고 있다.

인사 청문을 비롯해 일자리 추경마저도 무조건적 거부로 일관하는 야당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리는 일조차 짜증스럽다. 그게 준비된 대통령과 정쟁하려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으나 비로소 깨달은 야당이 되기 위한 인식변화이거나 훈련일지라도 그 결과에는 항상 `주권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촛불은, 그리하여 비로소 나라이고 국민임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만든 원칙은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천명하는 지속가능성이며 미래지향성이다. 결코 흔들리거나 꺼질 수 없다.

혹여 그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통해 `국민'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거나, 긁어 부스럼식의 상처 내기를 통해 정치권의 독식으로 `국정'을 폄훼하려는 시도로 `정국'을 끌고 가려는 저의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끝날 때 없이 지속하여야 할 나라다움과 헬조선의 탈출을 위한 청년 희망은 사안 사안의 분절 혹은 끝장이 아닌 둥근 원처럼 서로 이어지고 소통하는 협치의 궤적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태생적이고 반사적 감각으로 치를 떨어야 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미는 손을 잡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야당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정확한 배분을 통해 충실하게 입장을 전하는 언론 역시 독자와 시청자의 한계를 넘어 `국민'과 `주권'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와 반성이 필요하다. 과연 그동안의 언론은 이쪽 여당과 저쪽 여당을 차별적이고 편파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그럼에도 논공행상은, 그 찬란한 승리의 주역은 국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 역시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과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되는 특정 집단의 논공행상이 힘없는 이들을 함부로 대했던 폐해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80%에 육박하는 국민의 지지. 아! 그런데 세상에 흠결 없는 이를 찾는 일이 이토록 험난한가? 이 지긋지긋한 양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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