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변이면 어떤가
눌변이면 어떤가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7.06.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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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이재경 국장(천안)

연초에 작고한 고 이근영 천안시장은 유능한 행정가이면서도 달변가였다. 3선의 천안시장 재임 기간 중 그는 행사장에서 거의 원고를 보지않고 연설을 했다. 공보실이나 총무과에서 애써 준비한 원고가 휴지 조각이 된 경우가 허다하다.

민간이 참석하는 행사장 뿐 아니라 상급 관청이 주재하는 회의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도지사 주재의 회의에서 가감없이 불합리한 점을 조목조목 따져 `강동육주'를 빼앗아 오듯 전리품을 챙기는가하는 등 달변을 뛰어넘어 상대를 승복시키는 논리력을 펼쳐 주변을 곤혹스럽게 했다.

유머 감각도 있었다. 간부회의를 주재할 때면 상황에 맞는 위트를 툭툭 던져 회의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어쩌다 기안이 잘못된 결재판을 들고 찾아온 말단 부하 직원에겐 직접 `선생님'같이 가르쳐주는 자상함도 있었다.

그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다. 현역 은퇴 직전까지 그 후에도 책을 끼고 살았다.

시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고서와 최신 시사베스트 셀러, 인기 소설까지 구입해 읽었다. 많이 읽기도 했지만 정독을 하는 습관 덕분에 한 번 본 책은 거의 그대로 머릿속에 익혔다. 대부분의 달변가가 지식 수준이 높은 걸 보면 평소 독서량이 `달변력'의 밑받침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거물급 정치인 중에 대표적인 달변가는 역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의 1971년 4월 대선 장충단공원 연설은 그중에 압권이었다. 이른바 광장 정치 시대였는데 그 때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들으려 무려 80만명이 운집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주제를 논리적이며 설득력있게 호소해 청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결과는 94만 표 차이의 패배였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의심을 할 정도로 명연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세 연설뿐만 아니라 평소 대화에서도 막힘이 없는 화술을 자랑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말로 유명한 이른바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다. 비록 검찰 개혁이란 목적 달성엔 실패했지만 전국에 TV로 방영된 이 토론에서 그는 혼자서 20여명의 검사들을 상대하는 입담을 보여줬다.

두 대통령의 공통점은 엄청난 독서량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감 생활 중에 읽은 독서량이 중형 트럭 한 대 분량이고 퇴임 후 연세대 도서관에 자신이 소장했던 1만7000권의 책을 기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자신의 책이 컨테이너에 가득 찼다고 한다.

국회 청문회장에 등장하는 후보자들이 연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통과가 유력시되는 후보자들과 야권에서 결사 반대를 하는 이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후자들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아쉬운 점은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 만큼이나 많이 접했을 자신의 전문 분야 책자 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보인다.

사드 배치에 대한 견해를 묻자 `다른 질문에 대비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다'는 동문서답도 나왔다. `눌변'이면 어떤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상식에 기초한 진정성있는 답변이라면 더듬거려도 혼낼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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