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닦는 밤
구두 닦는 밤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7.06.11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늦은 밤. 거실 전등을 끌 때면 현관으로 눈이 간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남편의 단화. 작고 뭉툭한 발에 길들여지며 맵시 흐트러진 가죽표면엔 어느새 주름 골이 깊다. 뒤축이 닳아 살짝 들려진 뒤꿈치가 허세 속 감춰진 고단함 같아 사소하게 품고 있던 섭섭함을 내려놓는다. 오늘은 그 옆에 낯익은 군화 한 켤레가 놓여있다. 흙먼지가 뽀얗다. 제대 후 첫 예비군 훈련에 다녀온 아들 군화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깔끔하게 정리했을 텐데 훈련이 고되었나보다. 현관 밖으로 가지고 나가 먼지를 떨고 끈을 정리한다. 남북 관계가 민감해질 때마다 가슴 쓸어내리며 제대를 기다리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땅의 수많은 아들들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된 밤을 지키고 있겠지. 언젠가 현충일 특집으로 방송되던 다큐멘터리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을 본 적이 있다. 뼈만 남은 유해는 웅크린 채 여전히 철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하에 오래 잠들어있던 그 어린 젊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었다.

청년 영정을 안고 늦은 장례를 치르러 가는 그의 아들은 머리 하얀 육순 넘긴 노인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듯한 풍경을 지켜보는 아내는 얼마나 안타깝고 기막힌 심정일까.

오래된 영화 `해바라기'가 유월이면 여전히 떠오르는 건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한 공감 탓일게다.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지만 살아있을 거란 믿음을 안고 러시아를 향해 먼 여정 길에 오른 그녀. 기차가 우크라이나를 지날 때 끝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들판은 전쟁터에서 학살당한 이탈리아인들이 돌아가지 못한 채 묻혀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묻혀있는 우리 산하처럼. 바람이 일렁이는 해바라기 사이로 불안감과 간절함이 뒤섞인 감정을 추스르며 헤매던 그녀. 그러나 고달프고 외로웠던 여정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하는 남편 안토니오는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을 구해준 러시아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 안토니오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아내 마샤는 지오반나에게 낡은 그의 군화를 꺼내 보여준다. 닳고 낡아 헤진 신발에는 전쟁터에서 사경을 헤매던 처절한 안토니오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구두를 보며 애써 감정을 삭이던 지오반나. 사랑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어긋나버린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이별을 선택하는 두 연인. 기차는 떠나고 해바라기만이 처연하게 화면을 채운다.

우리 땅에도 잃어버린 가족을 그리며 애 태우는 이산가족이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다. 그들의 수많은 사연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징집된 남편과 헤어져 유복자를 키워온 아내가 미수의 노인이 될 때까지 간직한 것도 혼인날 남편이 신었던 새 구두였다. 짧지만 함께한 사랑, 아름다웠던 기억을 품은 시간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구두. 더 늦기 전에 그들의 긴 기다림에 답이 있기를 꿈꾼다. 구두에는 삶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인내한 수많은 고뇌와 견딤이 담겨있다. 그 구두들이 디디어 다진 길은 과거를 품고 오늘을 살게 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들어와 현관에 눕는 신발들. 먼지를 떨며 그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생각하는 유월의 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