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어부
도시 어부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6.0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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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인생을 쇼부 치고 싶었다. 그 생각에 밤새 잠을 설쳤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새벽 4시가 돼서야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을 거란 판단이 섰다.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나왔다. 새벽의 정적을 밟으며 욕실에 들어가 긴 샤워를 했다. 이번엔 쇼부 칠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을 가방 가득 담아 어깨에 메고 시험장을 향했다.

시험장 컴퓨터에 앉았다. 타닥타닥 답안을 작성하는 컴퓨터 자판소리가 마치 어부들이 그물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로 같은 뇌 속에 숨어 사는 글자들을 잡으러 그물을 치는 도시 어부. 힘찬 어부들의 팔 근육이 자판을 두드리며 싱싱한 글자들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답안을 작성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집에서 예상문제를 뽑고 예상답안을 작성했을 땐 분명히 기획에 맞는 폼을 선택해 그 순서에 맞게 작성을 했다. 그런데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서 옆 사람의 답안이 설핏 눈에 들어왔을 때 내 머릿속은 둔기로 맞은 듯 멍해졌다. 그야말로 헐~ 이었다. 2시간 가까이 답안을 작성하는 동안 어쩌자고 한순간도 내가 작성한 답안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까맣게 엉뚱한 답안을 작성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번 시험은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이 들자 김이 확 빠지면서 맥이 풀렸다. 빈 그물만 들고 돌아오는 어부처럼.

책상에 딱정벌레처럼 납작하게 앉아 논술시험 시간을 기다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야구 선수 요기 베라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뭘 해도 늘 한 발 늦는 나는 평소에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스스로 위안을 하며 살곤 했었다. 논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그 말은 오늘에 적용될 말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분명히 공부했던 내용인데 그 정책 용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침이 나올 듯 말듯 나오지 않을 때의 그 답답함이라고 할까.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용어와 내용이, 나를 또 한 번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이미 끝난 것이다. 90분인 논술 시간은 왜 그리 길던지. 논술 답안을 작성하고 나니 20분이 남았다. 다른 사람들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타닥이는 소리가 교실 안을 집어삼킬 듯했다.

출력된 답안지에 사인을 하고 의자에 앉아 한심한 나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저녁은 염소 전골을 먹어야겠다로 생각이 옮겨갔다. 인생 쇼부는 못 쳤지만 고생한 내게 염소탕을 먹여야겠다고. 시험이 종료되자마자 강서에 있는 까망염소로 갔다. 염소전골을 시켜 놓고 노릿한 염소 살을 씹으며 생각해 본다. 이 염소도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매~ 하며 울었을까 아니면 그냥 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온다. 무거운 구름이 아래까지 깔려 날이 흐리지만 오히려 기분은 가볍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 잊고 일상에 최선을 다하리라. 그리고 다음에 내게 인생을 쇼부 칠 기회가 온다면 미리미리 준비하리라. 다시 행운을 잡을 그물을 꿰매리라. 촘촘한 그물을 짜서 어떤 행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인생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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