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으라 하니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6.0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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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우리 아이가 어릴 때 일이다. 항아리를 전등불 앞에 비추고 있었다. “뭐 하느냐?”고 물었더니 빛을 항아리에 담아서 어두운 방에 가서 나오나 보려는 것이라 했다. 빛을 항아리에 담아서 어두운 곳에서 나오게 한다는 생각이다. 참 엉뚱한 발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항아리는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쌀도 담고 물도 담고 심지어 공기까지 담을 수 있다. 이 항아리에 빛을 담겠다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안 되는 일이다. 왜 빛을 항아리에 담을 수 없을까?

전등을 켜면 방안에 빛이 가득하다. 하지만 전등을 끄는 순간 빛은 사라지고 없다. 조금 전까지 방안에 가득했던 빛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데 조금 전에 정말로 방안에 빛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만약 방안에 빛이 없었다면, 이 환한 밝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깜깜한 밤하늘은 빛이라곤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밤에도 태양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밤에도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태양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빛을 발하고 있다. 밤에도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우주 공간을 골고루 퍼져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밤하늘 저 멀리에도 태양의 빛은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두운 밤하늘은 태양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밤하늘에 지나가는 빛이 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

빛이 있다고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은 참 멍청한 물건이어서 아무리 빛이 많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빛을 보지는 못한다. 밤하늘은 빛으로 가득하지만 그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어둡게 보인다. 방이 환한 것은 방에 빛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방이 밝은 것은 방안에 있는 빛 때문이 아니라 벽 때문이다. 벽에서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방이 밝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물체를 본다는 것은 물체가 `저기'에 있고 내 눈이 저기에 있는 물체를 스스로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 눈은 `저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눈은 자기에게 들어온 빛만 본다. `저기'에 무엇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눈이 아니다. 눈은 생각도 없고 판단도 할 수 없는 참 멍청하고 고지식한 물건이다. 그 고지식한 눈이 입수한 정보를 마음이 분석하고 판단하는 행위를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빛,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드는 빛. 그런데 우리는 진정으로 이 빛을 보고 있는가? 빛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빛으로 물체를 보고, 빛으로 물체의 색깔을 보고, 빛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만 정작 만물을 보게 하는 빛을 우리는 보고 있는가?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이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 빛이었다. 빛이 창조되고 그다음으로 만물이 생겨났다. 그것은 빛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다. 우주는 빅뱅이라는 대 폭발로 생겨났다. 빅뱅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지금 이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이 에너지를 빛이라고 표현해도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빛이 소립자가 되고, 소립자가 모여 원자가 되고,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가 모여 물질이 되고, 물질이 모여 별이 되고 지구가 되고 그렇게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한 줄기 우주의 역사라면 다른 한 줄기 생명의 역사도 있다. 빛으로부터 원자와 분자가 되고, 분자가 모여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모여 생물이 되고, 생물이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그리고 세상이 되었다. 빛,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모든 있는 것을 가능케 하는 빛, 빛이야말로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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