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 2
벽초 홍명희 2
  • 김홍숙<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06.0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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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벽초 홍명희 선생은 동지들을 따라서 동제사에 가담하여 활동하게 된다. 동제사는 `동주공제'라는 명칭대로 동포 간의 상호부조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모체가 되었다.

1918년 북경에 체류하면서 단재 신채호와 재회하여 평생지기로서 막역한 우정을 쌓게 되며 귀국하여 향리 괴산에서 장남 홍기문의 학업을 지도한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고 오겠다고 일제에 허락을 얻은 벽초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의 격렬한 것을 보고 충북 최초로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고향 사랑채에서 손수 작성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게 되는데 괴산 장날 학생과 주민 700여 명이 뒤를 따르며 함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만세 시위로 인하여 홍씨 가문의 남정네들은 투옥되고 결국 이듬해 70여년을 살아온 인산리 저택을 매각하고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주하게 된다. 청주형무지소에서 만기 출감한 벽초는 정인보 선생과 함께 내장산 일대를 여행한다.

1925년 중국에서 망명 중인 신채호 선생의 요청으로 동아일보에 그의 사론 `평양패수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을 연재한다. 시대일보 편집국장에 이어 부사장직에 취임하며 칼럼 `학등'을 연재한다.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 부임하며 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에 발문을 쓴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는데 산파 역할을 한다. 신간회는 지회가 전국 각지에 100여 개소에 회원이 3만명으로 대단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9년 신간회 주최로 광주학생운동은 기미운동 후 초유의 대사건이 된다. 벽초는 허헌, 권동진 등 3대 신문사 간부들과 화합하여 `광주학생 사건에 대한 일제 관헌의 조치를 규탄하기 위해 민중대회 개최 결의'를 준비한다. 연사로는 권동진, 허헌, 조병옥, 벽초, 김항규, 이관용 등이며 격문 2만매를 인쇄한다.

일제는 당일 새벽 검거에 나서서 허헌과 20여 명이 체포되고 신간회는 본부수색, 인쇄물이 압수된다. 결의문을 3대 일간지에 배포하고 산회한 후 얼마 안 되어 벽초와 조병옥, 이관용이 체포되었으며 신간회 사건으로 간부 40명, 총 90명이 검거되었다.

벽초와 11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다. 위 내용은 `독립운동사 자료집',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에 기록된다.

1932년 서울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며 소설 임꺽정 연재를 재개한다. 김정희의 문집 `완당 선생 전집'을 교열한다.

조선일보에 `문학에 반영된 전쟁'과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칼럼 `양아잡록'을 연재한다. 중국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옥사하자 조선일보에 `곡(哭)단재'를, 조광지에 `상해시대의 단재'를 기고한다. 심훈의 `상록수'에 서문을 쓰고 임꺽정 화적편 연재를 시작한다.

홍대용의 문집 `담헌서'를 교열하고 문일평이 사망하자 `곡호암'을 발표한다.

시국이 악화되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으로 이주한다.

1941년 조광지에 임꺽정 화적편`자모산성'일부가 실리지만 그 후 연재는 영구히 중단된다. 1945년 해방의 감격 속에서 시 `눈물 섞인 노래'를 짓고 서울 신문사 고문에 취임한다.

1946년 벽초를 중심으로 민주 통일당 제1회 발기회가 개최되고 장남 홍기문의 `조선문법 연구'에 서문을 쓴다. 1948년 을유 문화사에서 임꺽정 6권이 간행된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북에 남게 된다. 과학원장과 부수상을 역임하고 1968년 81세로 별세하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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