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리
푸리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06.0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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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역전의 풍경은 오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의 발자국과 먼길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의 발자국이 뒤섞이기도 하고, 막상 도착은 했으나 머뭇거리는 눈빛과 아예 멀찌감치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어버리는 눈빛이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전화기를 들고 안부를 물으며 씨앗처럼 심겨지는 말과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처럼 용케 해독되는 말이 사진으로 현상되기도 하는 곳이잖아요.

조치원역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인 날이 있었습니다.

지난달 19일 저녁이었지요. `푸리'라는 무용 공연이 장날이라도 만난 듯이 좌중을 한바탕 휘어잡은 겁니다.

젊은이와 어르신, 외국인들이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호흡하는 모습도 대단했지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터져 나오던 “거 참 잘한다”라는 탄성은 즐거운 추임새가 되기도 했지요.

`푸리'는 `풀이'라는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었는데, 역전 광장의 분위기를 들썩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누굴까 궁금했습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단단한 기개가 느껴지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혜리 세종무용단'을 이끌고 있는 유혜리 단장이었지요. 자신이 출연하기 전까지 객석과 무대 뒤편에서 불꽃처럼 타들어가는 목을 물로 축이며 서서히 몸을 풀어주다가, 공연의 절정 부분에 무대에 나타난 그는 온갖 매였던 것들을 풀어주는 치유의 춤사위를 봄날의 꽃비처럼 흩뿌렸습니다.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람들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해온 춤을 보면서, 때론 춤을 추기도 하면서 우리는 삶의 희로애락(喜怒哀)을 풀어놓습니다. 그만큼 기쁨은 더 커질 수도 있고, 슬픔에 대해선 작별을 선언할 수도 있겠지요. 춤은 삶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봅니다.” 춤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유혜리 단장의 평소 생각이 반영된 공연이었습니다.

세종시의 문화예술역량을 높이고 시민들의 삶에 춤을 통한 남다른 향수(鄕愁)의 기억을 남겨주려고 청년의 전문예술인들이 모여 꿈과 열정으로 만든 `유혜리 세종무용단'의 성장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한 두 개가 아닐 겁니다.

춤판을 벌인 곳이 역전 광장인 것도 절묘한 선택이었습니다. 혼잡한 역전 광장으로 비유될 수도 있는 우리의 마음들이 그동안 껴안고 있던 분노와 우울과 슬픔과 두려움의 매듭들을 일시에 풀어주었으니까요.

“푸리는 쉬리다!” 공연을 목도한 제가 드러냈던 짤막한 감상이었지요. 요즘 유행하는 표현처럼 `한 발 더 들어가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청정한 물에 사는 쉬리처럼 `푸리'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것을 보라고 주문했다. 발을 구르고 팔을 내뻗으며 서로 어울려 춤을 추자고, 그러다 지쳐 쓰러져도 좋으니 환호하자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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