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발소리
거인의 발소리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7.06.01 1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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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그녀의 카스 메인 글귀를 보는 순간 내 심장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녀의 카스에 얼굴을 내밀고 내게 조용조용 말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그녀는 내 직장의 수장이다. 그런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니. 본인을 한없이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모습이 그 글귀에 모두 집약되어 있었다. 종일 글귀가 나를 떠다닌다. 구겨진 종이처럼 꼬불한 내 머릿속에 긴 실타래같이 풀어진 글귀가 하루 종일 감기지 못하고 여운을 남기며 풀려 있다.

어수선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러 명암저수지를 향했다. 잔잔한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면서 글귀를 산책로에 쭉~ 깔아 놓고 곰곰 생각에 젖는다. 어느덧 하늘엔 별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반짝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까만 하늘을 뚫고 나온 별들을 보며 나를 본다. 내 가슴에 둥둥 떠다니는 오만 덩어리를 들여다본다.

난 그동안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내가 못한 것은 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오늘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가당치 않은 오만함을 가슴에 품고서 꼿꼿하게 콧날을 세우고 다녔었다.

그녀가 내 인생의 페이지에 처음 등장한건 작년 봄이었다. 참 당당해 보였다. 난 그 당당함이 좋았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표정이 봄날 넓은 뜨락에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같았다. 게다가 버스 손잡이처럼 생긴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대담해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톱을 봤을 때 그야말로 통쾌했었다. 초록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네 번째 손톱에는 포인트로 노란 메니큐어를 칠했다. 내게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는 관리자의 모습을 전복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직원 조회 때 마다 들려주는 그녀의 짧지만 가슴을 두드리는 말은 일주일 내내 내게 남았었다.

오늘 그녀와 함께 글짓기 심사를 다녀왔다. 20년째 문학회에서 글짓기를 주관하고 있다는 그녀. 그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그녀가 의미 있는 일에 같이 가자고 제안해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해마다 오월이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왔다고 했다. 이런 저런 대화 끝에 그녀가 말한다. 다른 사람이 주는 촌지나 뇌물은 고름이라고, 고름은 절대로 내 살이 되지 않는다고. 또 한 번 “쿵!” 하고 거인의 발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늘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까만 하늘에 깨알같이 뿌려진 별들을 보며 머릿속에 하루 종일 맴돌았던 글귀를 마음의 실타래에 감아본다.

산책하는 보폭에 맞추어 차근차근 실을 감으며 오늘 하루를, 아니 내 삶을 돌아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만큼의 삶의 내공이 쌓여야 그런 생각들이 술술 풀리는지. 밤바람에 뺨을 맞으며 어설펐던 내 삶을 반성해 본다. 그리고 하루하루 낮은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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