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특이사항
고객 특이사항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7.05.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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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단말기에서 뽑아든 배달주문 내역을 확인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객 특이사항에 육두문자를 풀어서 표현한 내용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만약 발견하지 못하고 배달을 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며칠 전까지는 영수증 인쇄단말기가 없어서 수기로 고객 주문내역과 주소를 써서 배달했었다. 그런데 노안 때문에 시력이 저하되어 모니터의 활자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숫자 3을 8로 쓰기도 하고 6자나 9자를 0으로 표기하는 실수가 빈번해졌다. 예를 들어 ㅇㅇ아파트 1403호가 1408호로 둔갑하여 엉뚱한 곳으로 배달가야 하는 남편도 힘들어지고 나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매번 돋보기를 쓰고 메모를 하는 것도 번거로워 영수증을 인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돌방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가끔 진상고객들을 상대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가게를 하는 사람들의 처지다. 가끔은 통닭 한 마리에 소비자는 왕이라며 왕으로 군림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어 시비가 붙기도 한다. 왕이 왕 같이 굴어야 왕대접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저러한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졸렬하지만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소심한 복수를 하게 된 것이 고객 특이사항이다.

내가 진상고객을 분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특이 사항에 고객과의 마찰 강약에 따라 메모를 해서 저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문이 올 때마다 정중하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라고 묻기만 하면 된다. 갑 질 좋아하는 고객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주는 이는 내 경험으로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두세 번만 거절하면 자연스럽게 진상고객은 퇴출이 된다. 이를테면 특이사항 메모는 갑질하는 고객을 분류하는 나만의 블랙 리스트였던 셈이다.

오늘처럼 퇴출되었다고 생각한 고객이 주문 전화를 다시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명하게 쓰인 `포도 씨 발라먹을 놈'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써놓은 내용을 열거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럽고 기가 막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다 외운 구구단을 왜 그리 열심히 외워 2x9=18이라고 또박또박 써놓았는지 참지 못하고 욱하는 내 성격 탓이리라.

고객과 마찰이 생길 때는 화도 나고 속상한 마음에 어쭙잖게 갑질하는 고객을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욕설이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걸 보고 자업자득이라고들 하나보다. 짧은 생각과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저지른 일 때문에 앞으로 나는 특이사항 메모를 꼼꼼히 살펴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씁쓸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기꺼이 감내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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