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 솥으로 힐링을
무쇠 솥으로 힐링을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5.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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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의 가슴처럼 벌겋게 타들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쓰인다. 마냥 두었다가는 아주 쓸모없게 될까 걱정이고 삶의 방편이 되었던 어머니의 무쇠 솥이 생각나서다. 소댕을 열어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를 보는 듯 푸근해진다.

우리 집 부엌의 으뜸은 무쇠 솥이었다. 의미의 중요성도 있지만 태깔도 그랬다. 뿐만 아니라 삼시세끼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의연히 감당하고 소리 없는 눈물로 가문을 지켜내었다. 조신하게 그러나 가장 깊은 무게로 안방을 지키는 어머니와 같았다.

어머니는 날을 잡아 화기로 담금질한 솥에다 기름 옷을 입히셨다. 부엌에서 치르는 최고의 의식이야 소반을 짓는 행위이지만 최고를 위한 최선의 의식도 중요했다. 종부의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세월을 두고 비손하듯 행하셨다.

인고의 세월을 살다 가신 내 어머니를 알기에 나는 저 녹슨 무쇠 솥을 외면할 수가 없다. 방법을 찾아 본래의 모습을 이끌어내고 조악한 내 마음도 함께 마름질하면 참선으로 다듬어진 선가仙家의 사람처럼 결이 고와지려나.

산기슭에다 꽃밭을 만들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바통을 이어받아 꽃이 피고 진다. 남편과 지인들이 귀퉁이에 불쑥 가마솥을 걸었다. 닭장에 키우던 닭을 잡고 마음이 켕기는지 키우던 개는 손해 본 듯 바꿔 와서 도르리를 했다. 원시적 DNA가 혈관 속에 녹아들어 그 습성이 세기를 두고 흘러온 것은 아닌지 몰라. 비릿한 아니 피 냄새를 즐기는 야성이 보인다.

그런 날은 내 상상이 선사시대를 더듬어간다. 사냥으로 길들여진 우람한 근육에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슴베찌르개로 사냥감을 향해 내리꽂았을 것이다. 끼닛거리가 해결되면 만족했고 원시의 땅에서 힐링을 외칠 일은 없었다. 주먹도끼에 힘을 실어 사냥감을 해체하던 모습이 저랬을까. 젖가슴과 아랫도리만 슬쩍 가린 그녀들이 부싯돌로 불을 지폈을 게다. 날것을 먹던 식성이 채 가시지 않아 핏기 남은 살점을 먹었음직하고 사냥감을 후리던 전사의 용맹을 즐겨 떠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 샤먼의 거친 춤사위와 원시적 언어로 감사의 의식도 치렀을 게다.

어느 날 가마솥이 창고행이 되어버렸다. 의미를 잃어버린 무쇠 솥은 벌건 녹 때가 오르기 시작했다.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더니 그깟 것이 그리 중요하냐는 눈치다. 그럴지도 모른다. 알약 하나로 끼니가 해결되는 세상이 오면 흉물스런 유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무쇠 솥은 그깟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반도를 지켜온 흔적이요, 여인네들의 암묵적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속절없는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고 매서운 정신이 서려 있다. 저 벌겋게 타오르는 노여움을 다독여서 삭여내고 절망스런 녹 때를 닦아 내어야겠다. 좌절이 따를지도 모른다. 한 겹 벗겨 내는 일이 그리 수월하다면 결과는 큰 의미가 되지 못하리라. 어머니처럼 그 솥에다 밥을 짓고 피붙이들의 먹성 따져서 푸짐하게 닭도 몇 마리 잡아야겠다. 때로 힐링이 필요한 객이 문자라도 날리는 날엔 서둘러 밥을 안쳐야겠다. 올여름엔 무쇠 솥 그 진중한 무게와 은근한 깊이로 가슴 뜨거운 힐링을 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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