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의 한이 서린 관산성과 구진벼루
백제 성왕의 한이 서린 관산성과 구진벼루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5.2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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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충북 옥천지역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성곽들이 많다. 또 전쟁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이 지역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각축장이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학창시절에 백제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관산성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한 두 번씩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옥천하면 처음 떠오르는 산성이 관산성이다.

백제 성왕의 한이 서린 관산성은 어디에 있을까? 관산성이 옥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정확한 위치가 어느 곳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옥천 고리산의 환산성을 관산성이라 보기도 하지만, 현재는 대략 옥천읍 군서면과 삼양리 일대의 서산성과 삼양리 토성을 포함한 서화천 일대로 보고 있다.

관산성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펼쳐진 관산성 전투가 신라와 백제가 국운을 걸고 온힘을 다하여 싸웠던 전투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며 통일의 발판을 다진 반면, 백제는 큰 타격을 입고 삼국간의 관계에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475년 고구려가 불시에 침공하여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을 빼앗긴 백제는 왕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다시 힘을 회복한 백제는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특히 백제 성왕은 고구려가 안팎으로 위기를 맞이하자, 신라, 가야와 연합군을 조직하고 한강으로 북진하였다. 성왕은 드디어 551년 꿈에도 그리던 한강 하류의 6개 군의 땅을 75년 만에 되찾았다. 신라도 백제의 승리하는 틈바구니에서 죽령 넘어 10개 군의 땅을 차지하였다.

위기에 처한 고구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신라와 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에 신라는 553년 방심하고 있는 백제군을 쳐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고, 이곳에 신주를 설치하였다. 격분한 성왕은 554년 7월 신라에 대한 일대 결전에 나서게 되었다. 백제는 부여를 출발해 관산성을 점령하고 이어 보은·상주·안동을 거쳐 내친 김에 경주까지 쳐 들어가 결판을 낼 작정이었다. 그 첫 결전지가 관산성이었다. 관산성은 신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추풍령을 넘어가는 교통로에 위치하여, 만일 이곳을 잃게 된다면 한강 하류의 신라군이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신라는 전체 신라군을 총동원하여 백제군에 대항하고 나섰다.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관산성을 함락하고 신라 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 요새를 쌓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구천에 이르렀는데, 정보를 입수한 삼년산군 출신의 신라군 도도가 이끄는 부대가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성왕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죽여 버렸다. 이를 계기로 신라군은 총공세를 퍼부어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백제는 좌평 4명을 비롯해 3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몰살당하였다.

이 전투 이후 나제동맹은 무너지고 신라와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적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금강 상류지역에서 두 나라의 대결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 두 나라 운명의 갈림이 바로 이곳 옥천 땅에서 일어났다. 서화천가의 구진벼루에 서서 그토록 바랬던 한강유역을 되찾아 기뻐하다가 배신을 당해 울분에 가득 차 신라를 공격했던 성왕의 모습을 그려본다. 봄에 바라보는 구진벼루가 더욱 황량하고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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