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
호밀밭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7.05.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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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온통 푸름이다.

푸른 나무들이 푸른 숲을 만들고 푸른 하늘이 대지에 내려앉았다. 그 대지 위로 푸른 바람이 분다. 짧은 머리칼을 날리고 가벼운 옷 속을 기웃거린다. 마음에도 바람이 든다.

바람의 딸이 아니라도 일탈을 꿈꾸는 것은 당연할 터다.

안성의 호밀밭을 찾아가는 길이다. 처음 본다. 그래서 더 오고 싶었다.

흔들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호밀밭이 드넓다. 밭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겪어야 하는 무거움 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청량하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바람이 끊임없이 흐른다. 푸른 천지 세상에서 나만 홀로 거꾸로 간다. 열여섯 살에 멈췄다.

`나 먼저 돌아온 날은/ 서둘러 밥 먹고 호밀밭 가에 나가 서서/ 그 애 지나가는 것 지켜보았습니다'성인이 되어 읽었던 심호택 시인의 `호밀밭 모퉁이'라는 시의 1연이다. 하얀 교복을 입은 소녀를 짝사랑하는 순수한 풍경화다. 사춘기 시절, 통학열차 안에서 모르는 남학생이 내 가방 안에 몰래 넣던 편지도 호밀밭의 풋내처럼 순수한 짝사랑이었다. 푸른 웃음을 짓게 하는 그 남학생이 누군지 지금도 모른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에 끌려 읽은 소설이 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작품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16세 소년인 홀든이 세상의 거짓과 허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외적, 내적 갈등을 다뤘다.

넓은 호밀밭 벼랑 끝에 서서 누군가의 잘못으로 벼랑으로 떨어지는 아이들이 생기면 그 애를 잡아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주인공은 순수한 세상을 꿈꾸지만 부유하고 성공한 부모와 형이 있는 집안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기는 대다수 청소년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꿈을 꾼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틀을 거부하는 반항기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고전소설이어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는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파수꾼이 되어야겠다는 목적을 갖게 했다.

이곳에는 홀든이 아닌 다른 파수꾼이 있다. 호밀밭 가장 높은 언덕 위에 피사체로 서 있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키 큰 미루나무와 밭 가운데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다.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어 준다는 것은 모든 걸 참아내는 인내심과 사랑이다. 나무들로 인해 호밀밭의 풍경은 더욱 진한감동으로 다가왔다. 호밀밭을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의도도 그렇지 않을까. 호밀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자운영처럼 토질을 향상시키는 유기질 비료로서 많이 재배되거나 주로 사료로 쓰였다.

호밀가루는 탄력성이 떨어져 밀가루와 혼합해야 제대로 된 빵이 된다. 언젠가 추운 나라에 갔을 때, 동행한 사람이 검은 빵을 먹어보라고 건넸다. 시각적으로 볼 때 거부감이 생겨 거절했는데 요즘은 비싸도 호밀 빵만 산다.

영하 25도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니 강한 생명력과 참을성으로 귀한 몸이 되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호밀밭 속에서 나도 바람에 일렁인다. 하얀 교복을 입은 열여섯 살 소녀처럼, 언덕 위의 미루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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