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가 온 세상에 향기를 내뿜는다. 제 모습을 드러내 놓지 않고도 향기로 자신을 이렇게 잘 알리는 꽃도 드물다. 고혹하지도 진하지도 않은 그윽하게 다가온다. 화려한 자태로 단번에 유혹하는 장미와는 달리 향으로 부르는 은근한 유혹이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내 안에서도 꽃송이가 피어난다. 몽우리가 부풀어 오르면서 가슴이 간지럼을 타기 시작한다. 마치 사춘기의 소녀처럼 발그레 부풀어 바람이 지나다 무심코 스치는 감촉으로도 감성의 세포가 들고 일어난다. 맨땅에 싹이 돋고 마른가지에 잎이 나오는 신비한 모습을 보고 어찌 마음이 들썽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들은 봄을 탄다지만 쉰 해가 되어도 변함이 없다. 나이가 들면 무뎌질 만도 하건만 여전하다.
올해는 유난히 가슴이 더 뜀박질을 한다. 밤이면 더 기세가 당당하여 잠을 못 자게 훼방을 놓는다. 먼저 찾아온 불청객인 갱년기는 호르몬제의 투여로 몸살 같은 통증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난데없는 사춘기의 증세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이 뛰고 머리도 아프고 잠도 못자니 말이다.
혹여 오십춘기(五十春期)라도 온 것일까. 이 나이에 사춘기의 들뜸과 설레이는 마음이면 더없이 환영 할 일이다. 아들이 스물여덟 살 먹도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건 기적이지 싶다. 가라앉지 않고 심해져 괴롭히는 불면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이상증세의 정체를 알고서 겪어도 겪어야할 것 같아서 의사를 찾아갔다.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 고혈압이라고 한다.
아주 고약한 녀석이다. 하필이면 사춘기증세의 흉내를 내어 나를 달콤새콤한 착각에 빠지게 했는가 말이다. 저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몸에 적응이 되기까지는 이럴 수가 있다고 한다. 의사는 체질은 저혈압인데 혈압이 왜 높은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갑자기 신경을 써도 생길 수 있다고 하는데 늘 써오던 신경이다.
어렵고 힘든 길을 가고 있는 아들에 대한 불투명함과 사업하는 그이의 하루하루도 걱정이다. 또 나의 글은 해가 갈수록 글이 숙성되어 깊어가야 하건만 수박 겉핥기만 하는 것 같아 고민이 된다. 이런 소소하게 마음을 쓰는 일은 누구나 다 하고 있을 텐데 나한테는 이것도 무리였나 보다. 얼마를 지켜보아도 혈압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73의 수치는 의사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이러다 큰일이라도 내게 될까봐 약을 먹기로 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나보다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생을 할 터이다. 그렇게 폐가 되어 살면 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주변에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달리 한 사람이 있다. 고혈압으로 약을 먹던 분이었는데 약이 떨어져서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을 귀찮아서 며칠 미루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챙겨야하는 두 번째의 불청객이 나에게 찾아왔다. 이 약은 한번 먹기 시작하면 끝까지 먹어야 된다고 한다. 내가 사는 날까지 달고 가야하는 것인가 보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고 하듯이 증세가 비슷한 연유로 사춘기 병쯤으로 착각하며 살기로 했다. 봄에 찾아온 애인 한 분. 고군(高君)을 안에 품고 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도 가슴이 뛴다. 이 나이에 연인을 가슴에 담은 죄다. 한번 들여놓았으니 끝까지 같이 가야만하는 길이다. 성가시다고 손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