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고양이의 웃음
체스고양이의 웃음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5.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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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보면 체스고양이가 등장한다. 고양이가 웃고 있는데 꼬리가 없어지고 다음으로 몸이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없어졌는데, 고양이 웃음만 남아 있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난다. 소설 속의 이야기니 그냥 웃어넘겨 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왜 웃음만 남으면 안 되는가? 고양이의 웃음은 고양이 몸에 붙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고양이 몸 자체인가?

사실, 체스고양이의 웃음은 도처에 존재한다. 한 사람이 나타내는 인상은 체스고양이의 웃음이다.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사람의 인상은 체스고양이 웃음처럼 남는다.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이 한 일들은 체스고양이 웃음처럼 오래 남는다. 체스고양이의 웃음은 고양이의 얼굴과 표정이 만들어낸 그 무엇이다. 여기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하자. 꽃과 나무, 흙과 돌들이 어우러져 정원을 만든다. 이 정원의 아름다움도 체스고양이 웃음이다.

모든 물체는 그 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것과 그 물질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속성이 있다. 이 둘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질은 있지만 물질의 속성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고양이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고양이 웃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에게는 고양이보다 고양이 웃음이 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지 속성은 아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물체의 속성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매우 특별한 능력이다.

물체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 뜨거운 물체가 있다고 하자.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온기는 물체 자체인가, 아니면 물체와는 별개인 온기라는 그 무엇이 와서 붙은 것인가? 냉기라는 말도 있다. 추운 겨울에는 벽에서 냉기가 나온다고 한다. 이 온기와 냉기란, 물질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무엇인가? 옛날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위 열소(熱素)라는 원소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자연에 냉기나 온기와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물체를 이루는 원자들이 빠르게 운동을 하면 온기로 느끼고, 느리면 냉기로 느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사람들은 마치 밝음과 어두움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밤이 되는 것은 어둠이 대지를 덮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냉기와 온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열이라는 것도 독립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물체의 분자운동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물체와 물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다. 물체는 실체이지만 속성은 실체가 아니다. 속성은 물체가 가진 성질이기 때문에 물체와 분리할 수는 없다. 물체의 길이, 부피, 모양, 질량, 온도, 색깔, 전하, 에너지 등은 모두 물체의 속성이지 물체에 붙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물체를 본 것을 바탕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이런 오류는 물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귀신 붙었다고 말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굿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람의 정신이 육체와 분리된 어떤 독립적인 실체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 오류이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굿을 한다고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의 모습인 사람의 성격은 육체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사라진 고양이 웃음이 있을 수 없듯이 물체가 없는 물체의 모양이 있을 수 없고, 질량이 있을 수 없고, 온도가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없고, 육체가 없는 영혼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질량, 모양, 색깔, 온도, 정신, 영혼은 도처에 존재한다. 몸이 사라진 체스고양이의 웃음처럼 말이다. 얼굴 없는 웃음, 참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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