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1.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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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문학은 살아 있는가
문학잡지가 팔리지 않는 시대, 장편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 순수문학작품이 대접을 못받는 시대, 일기인지 콩트인지 아니면 짧은 잡글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시(詩)라고 써 내놓고 시인이라고 자족하며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수많은 문인 같은 사람들의 행진.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 속에서 생활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즈음 어쩐지 우리 문학인들이 지향해야하는 시대적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문학은 진실을 통하여 표현되고 그 진실로 인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은 TV, 컴퓨터와 같은 너무나 시각적인 영상문화가 만연되어 있어 책으로 된 문학작품들이 다소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쩌면 영상매체를 접하며 생활해온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또는 노래를 통해서 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설화나 신화와 같은 것들을 서로가 공유했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진화되는 것처럼 원래의 모습보다 과장되고 흥미롭게 진화되어져 문학적 생명력이 꿈틀대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활자화 되어진 문학은 왕성하게 키워가던 문학적 생명력을 일정한 활자의 울타리 안에서 상상력의 한계를 지어놓게 했고, 이제 가시적인 영상매체는 그나마 남아있던 문학의 유연한 생명력조차도 옴쭉달싹 못하도록 완벽하게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도록 박제화 시켜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본질인 울타리 없는 상상의 생명력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있다고 생각이 될 정도다. 활자화 된 문학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각기 상상의 작품세계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활자화 된 문학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창작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화된 작품은 영상의 잘 짜여진 일방적인 가시적 연출로 인해 독자 아니 시청자들의 상상이나 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고 본다. 그 옛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설화나 신화의 시대와 영상매체가 판을 치고 있는 지금을 비교해 보면 태초에 꿈틀대던 문학의 유연한 생명력은 완전히 죽어버린 시대가 되었고, 사체가 되어버린 문학을 끌어안고 마치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죽은 엄마의 시체에 매달려 젖을 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어린 아기 같은 존재가 오늘을 사는 우리 문학인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촘촘하게 박힌 활자를 골치 아프게 보지 않아도 컴퓨터를 클릭하면, 또 TV를 켜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즐겁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주는데 누가 눈 아프게 소설을, 시를 읽겠는가.

과거 꼭 읽어야 되는 명작이라는 소설들을 읽고 그것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교양의 척도로 인식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적어도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날에 시집 한 권쯤을 선물하며 살았던 나이든 세대의 사람들조차도 이제 더 이상 문학작품에 애정을 보내지 않는 듯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간을 먹고 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문학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먹고 사는가 보다. 설화나 전설의 구전시대를 거쳐, 활자화된 문학의 시대는 이제 영상의 시대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 걸맞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문학인들도 의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가 된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마치 가야금 열두 줄을 고수해 오던 전통악기의 연주자들이 끝내는 스물네 줄의 가야금을 만들어 퓨전음악을 연주하며 뉴에이지 뮤지션들이 판을 치고 있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전통음악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문학인들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영상문학과 활자문학이 교차되는 이 전환기를 새로운 문학창조의 기회로 삼아 문학의 생명력이 꿈틀대던 태초의 유연한 창조의 힘이 다시 이 시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바로 세울 수 있는 시대의 선구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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