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초대장
화해의 초대장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5.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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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최명임<수필가>

내 삶에 두 번째 풍파가 밀어닥쳤을 때 우리 부부는 그 해일에 떠밀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미역국은 소태같이 쓰고 이밥도 속을 훑어 내렸다. 삶의 그래프가 요동칠 때마다 나는 심한 오한을 느꼈다.

60번째 생일날 달콤한 미역국을 먹었다. 남편이 36년 독재를 내려놓고 사랑하며 살자 하더니 미역국을 끓인다. 화해의 초대장이다. 넌지시 넘겨다보니 진국을 우려낸다며 고기를 삶는데 핏물과 기름기가 빠져나와 구정물처럼 뿌옇다. 한번 수루루 끓였다 버리고 새 물을 부어야 한다고 말해 줄 걸……. 다시마 몇 조각을 넣고 끓였더니 말갛게 걸러졌다. 내 혈관 속에 엉겨 붙어 순환을 방해하던 기름덩이와 숨어든 바이러스가 술렁거린다. `그래, 바로 이거였구나. 저니도 세월이란 필터에 저렇게 걸러진 것이야.' 모든 걸림돌과 제약을 뛰어넘은 통쾌한 승리이다.

열두 고개를 넘어 헐떡거리던 숨을 가라앉히고, 둔덕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여유의 찬과 함께 먹었다.

돌아보니 먹구름은 이유가 있었다. 놓쳐버린 것들은 상실이 아니라 신의 사랑법에 무의식의 내가 부응한 것이다.

이 평화로운 일상과는 달리 가끔 마음에 분란이 인다. 치유 불량인 채로 남아 있던 생채기가 뜬금없이 들썩대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날이 있다.

일상의 평화마저 겁탈당하기 전에 내 혈관 속의 바이러스를 걸러내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푸른 혈액이 온몸을 돌면 내적 평화도 맛보게 되리라.

그녀가 늦은 오후에 공기청정기 필터를 교체하러 왔다. 환하게 웃으며 들어선다. 탁한 공기는 새 필터를 통해 시나브로 걸러지고 후두염으로 거칠어진 내 호흡도 잦아들 것이다. 교체 주기는 60일이다.

사람의 60년도 생애 전환주기일까. 마음이 시끄러운 것은 내 안의 필터가 실증과 허증을 오가며 방전이 되어버린 탓일 게다. 필터링이 필요하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육신은 물론 정서적 허기를 뿌듯하게 채우다 보면 자동충전으로 잡다한 바이러스는 걸러질 것이다.

낯가림 심한 구두를 꺼내어 보송하게 닦았다. 난해한 속을 들킬까 봐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여겨보았던 7번가를 찾아들었다. 그곳엔 사고의 의관을 갖춘 선비가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고 있었고 화석이 되어버린 가슴을 건네받은 노익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풍경들이 후끈한 열감으로 내 삶을 비집고 들어왔다. 급체로 속이 울렁거리고 소화되지 못한 언어들이 머릿속에 나뒹군다. 나를 찾아 떠나는 초행길에 합류한 동지들의 눈빛이 웅숭깊다. 미맹을 깨우는 소리와 나를 찾아 헤매는 아우성은 점점 커지고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비범한 진리와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내 안에 죽어 널브러진 나의 부음訃音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하다.

한술 밥은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없지만, 안도감과 함께 허기를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시간은 짧고 가야 할 길은 아득한데 그곳에 가면 정겨운 이가 호롱불을 들고 서 있다. `그대를 위함'이라는 푯말을 달고 있다. 희망이라는 그를 사랑한다.

예순 번째 미역국은 그가 내게, 내가 나에게 건네준 화해의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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