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에 이는 바람
청보리밭에 이는 바람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5.16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드넓다. 한적한 섬의 들판은 청보리로 짙푸르렀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가 파도소리에 묻혀 춤을 추었다. 제 몸을 한껏 키우며 바람에 출렁이는 청보리들의 생동감은 마치 초록 양떼가 끝없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어지럼증이 인다. 보리잎의 흔들림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그 면적이 18만여 평이라고 하니 세상천지가 청보리밭이다. 초록 물결이 절정이라는 기별에 단숨에 날아간 곳, 가파도 청보리밭이다.

가파도는 제주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다. 바다로 이어지는 동안 한라산과 산방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주변의 풍광이 신비롭다. 가파도에 도착하자 청정한 올레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왁자하다. 삽상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연인들, 아이들과 동행한 젊은 부부들, 손을 잡고 허정허정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바다처럼 푸르다. 풍경에 취해 느긋하게 걷는 모습이 도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어 청보리밭 산책로로 들어섰다. 울멍줄멍한 돌들로 쌓아올린 밭 담이 예스럽고 정겹다. 푸른 바다와 청보리밭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광활하게 펼쳐지는 청보리들의 향연에 탄성이 절로 인다. 그때 거센 바람이 일자 일제히 청보리가 출렁거렸다. 무리지어 흔들리는 초록 옷의 춤사위가 황홀했다. 서로 몸을 기댄 채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다 바로 서서 존재를 알리는 천진한 얼굴들. 수수한 것들이 어찌하여 가슴을 흔드는가. 그것도 모자라 보는 이의 가슴도 초록으로 물들인다. 억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것은 그들만의 동지애로 서로 견고하게 받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서 있을 때는 쉬이 꺾일지 모르지만 서로 끌어안고 손잡아 주기에 쓰러지지 않는가 보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청보리밭을 걷다가 정자 마루에 앉아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가슴속이 확 트이고 잡다한 근심도 씻겨주는 듯하다. 누워서 바라보니 쓰러지다 일어서는 청보리의 흔들림이 왠지 서럽고 애잔하게 느껴진다. 문득 생의 거센 바람에 흔들리다 스러져가는 나를 보았다. 그해 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두 번째 수술실로 들어가며 두려운 마음에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던 나와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곁에서 눈물바람으로 손잡아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섰다.

인간도 청보리의 생애와 다르지 않으리라. 사람도 살다 보면 강풍에 수없이 쓰러지고 넘어지길 반복하며 살아간다. 어찌 꼿꼿한 생애만 있겠는가. 아마도 나를 지켜주는 가족이 곁에 없었다면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 모두가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바람이 청보리를 흔들지만 영원히 흔드는 바람도, 흔들리는 청보리도 없다. 강풍이 훑고 간 자리가 고요하듯 다시 본래의 자리인 중심으로 돌아온다. 바람에 무리지어 흔들리는 청보리가 아름답듯이 사람도 홀로 살아간다면 고달프고 외롭지 않은가.

모처럼 가파도 청보리밭에 묻혀 가족과 함께 한 여행은 오붓했다. 나를 돌아본 귀한 시간, 그 감동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 가슴은 초록으로 물들더니 이윽고 청보리가 출렁거렸다. 바람 불어 더욱 아름다운 가파도. 청보리밭에 이는 바람은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날린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라고. 살면서 흔들릴지라도 일어나 청보리처럼 꿋꿋하게 살아내란다. 힘들고 외로울 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어 아름다운 봄, 5월이 푸르게 익어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