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뚜름한 모델
삐뚜름한 모델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7.05.1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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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긴 머리를 깡똥하게 묶은 여학생이 지나며 인사를 한다. 헐렁하게 걸친 티셔츠 아래로 올 풀린 청바지가 경쾌하다.

“참 예쁘지? 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 예쁘면서도 미안해.”

목례로 답을 하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언니가 말한다. 연구실 가는 길.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낡은 책상과 빛바랜 벽이 오랜 시간의 흔적을 말해준다. 믹스커피 밖에 없다며 내민 찻잔에서 달큰한 냄새가 난다. 창밖 숲에는 아카시아 꽃무리가 하얗다. 송홧가루 때문에 닫아두었던 창을 여는 언니의 얼굴에도 오월의 생기가 가득하다. 내주 있을 강의 자료를 만드는 중이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즐겁게 중년을 즐기는 순한 여인인 줄 알았더니 전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내 말에 등을 두드린다.

정말 그러려고 했단다. 책이나 보며 그간 직장에 매여 못했던 여행도 하고 신나게 즐겨보려 했는데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막내딸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었단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간 친구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와 수업을 병행하느라 고단한 삶을 견딘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는 부모 덕에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출석을 안 해도 고학점을 받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는 막내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평범한 공무원으로 나라가 하는 일을 순진하게 정의로 믿었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더란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남은 시간 희망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간 공부한 전공을 살려 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언니의 말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터키 작가 아지즈네신의 작품 <삐뚜름한 모델>에는 개미, 물고기, 오리 개 등 여러 동물 부모가 등장한다. 그들은 새끼들을 불러놓고 자신들을 모델로 삼아 그대로 따르면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당부한다. 새끼들은 부모의 삶을 본받아 그들의 종족다운 동물들로 자라났다. 그들의 부모들은 숨을 거둘 때 자식들을 자랑스러워했고 부모의 도리를 다했음에 안도했다. 사람인 부부도 자식들에게 자신들을 모델 삼아 열심히 살면 자연스레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가르쳤다. 아이들은 부모를 고스란히 따라 부모를 쏙 빼닮은 어른으로 자랐다. 그러자 부모는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모두 헛되었다고 원망한다. 엄마 아빠를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라는 아이들의 항변이 오래 가슴에 남는 이야기다.

우리 세대 부모들은 그저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몸이 부스러져라 소처럼 일했던 세대다. 그 성실함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자식을 가르쳤다. 그런데 자식들이 사는 세상은 성실함만으로 밥을 먹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부모들처럼 열심히 살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우리는 삐뚜름한 모델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며 언니를 가볍게 안아주고 나오는 길 한 표를 부탁하는 목 쉰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온다. 오월 장미 대선. 우리들의 선택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기를. 반듯한 모델이 되는 첫 걸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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