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갱년기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5.14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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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오랜만에 청소를 했다. 씽크대를 정리하고 안방을 닦고 뒤꼍을 치우고 화장실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베란다를 치우려고 문을 열었다.

순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빨래를 널면서 베란다를 드나들었었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빨래를 널면서도 왜 그것을 못 보았을까.

베란다 구석에 지난겨울 던져두었던 양파자루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적막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양파는 붉은 양파자루를 뚫고 뾰족한 싹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마치 허공을 빨고 있는 연초록 빨대 같았다.

겹겹이 쌓인 먼지를 털고 양파 자루를 열어 양파를 꺼내본다. 버석이는 갈색 껍질이 마른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그 아래 양파의 허연 살이 드러난다.

살을 손으로 만지자 탱탱했던 살은 어디에 수분을 다 주었는지 쪼글거리며 얇아질 대로 얇아져 있었다.

겨우내 얼다 녹다를 반복한 양파는 반투명한 상태의 살을 달고 있었다.

망각의 긴 터널 속에 접어 두었던 지난 겨울.

양파는 어두운 베란다 구석에서 추위에 떨며 시린 몸을 꽁꽁 여몄으리라.

연초록으로 올라와 허공을 찌르고 있는 여린 싹이 가늘게 떨린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베란다 구석에서 양파는 온 몸의 수분과 양분을 모아 안간힘을 올려 싹을 틔웠으리라.

마치 청춘이 가기 전 그것을 놓지 않으려 온몸으로 열을 올렸다 내렸다 몸 앓이를 하는 갱년기 여자 같다.

양파를 하염없니 쳐다보다 문득 나를 싸고 있는 몸을 내려다본다.

양파를 쥐고 있는 마디 굵은 손가락이 거칠게 눈에 와 닿는다.

시선을 끌어올려 팔뚝을 더듬어 본다. 탄력을 잃고 늘어져 있는 살이 들어온다. 나도 몰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눈을 가재미처럼 옆으로 뜨니 이번에는 버석이는 머릿결이 겨울날 인적 없는 개울에 날리는 억새처럼 가늘게 후들거리고 있다. 문득 나를 담은 껍질이 안쓰러웠다. 보잘 것 없는 내 영혼을 담고 지구의 한 모퉁이에 홀로 뒹굴며 살다 세월의 때 겹겹이 입고 후줄근 해 진 내 가죽 부대.

내 몸을 쓰다듬어 본다.

“그간 묵묵히 나를 담고 지탱해준 내 몸피야 고생 많았다. 아직은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네 몸을 좀 더 세 들어 살테니 조금만 더 힘내주렴.” 햇살이 내리쬐는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미친년처럼 혼자 웅얼거린다.

양파의 물러진 살을 한 겹 한 겹 벗긴다.

탱탱했던 한 시절이 둥글게 떨어져 나뒹군다. 손끝에 비린 향이 올라온다.

생을 불질렀던 한 때의 추억인양 물컹한 향이 진득하게 몸에 달라붙는다.

물러져서 못 먹을 살을 벗기고 뾰족하게 올라오던 연초록 싹을 다듬는다.

봄을 향해 꿈틀대던 촉수, 초록을 놓지 못해 뒤뚱거리던 싹을 뚝뚝 잘라 뒤란으로 훅 던진다. 지구 한 모퉁이가 느닷없이 뺨을 맞은 듯 턱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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