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이 머무는 그곳
청풍이 머무는 그곳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05.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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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임현택<수필가>

벚꽃이 진 자리에는 푸릇한 이파리가 그늘을 만들었다. 하얀 구름이 가지 끝에 걸리고 파릇한 옷을 입은 숲속아랜 철쭉과 도리화가 만개하고, 잔가지 끝에 좁쌀같이 작은 꽃눈이 맺히기 시작하는 산자락이다. 겨우내 꼭꼭 숨겨 놓았던 새순들이 돋아 손만 닿아도 초록물이 터질 것 같은 이파리들은 튜닝 하듯 서로 앞 다투어 수채화 처럼 섬세하게 산자락을 덮기 시작했다.

나목이 파랗게 치장을 시작하는 요즘 나지막한 야산으로 산행을 갔다. 산허리를 돌자 갈잎이 수북이 쌓여 늦가을을 연상시키는 등산로엔 봄꽃이 흩날리고 있으니 또 다른 풍경에 취해 산행 즐거움 또한 더 하다.

산자락 중턱에 오르자 미간을 찌푸리게 되고 이내 실망을 했다. 산자락 능선을 거의 다 차지할 정도의 거대한 가족묘 때문이다. 크기도 왕릉 못지않다. 산소 주변 나무 가지들은 무두 잘려져 있고 커다란 나무는 산소에 그늘 만들까 염려로 나무 밑 둥을 도끼로 찍어 껍질을 벗겨내 말라 죽게 했다. 자신의 조상을 위해서 자연훼손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맨 아래는 후손들의 자리인 모양이다 너른 평지에 잔디만 심어져 있었다. 자손들이야 조상들의 위해 정성들여 묘지를 만든다고 하지만 우리세대가 보기에는 참으로 아이러닉한 일이다.

올해는 윤 5월이다.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 예부터 불경한 일을 해도 큰 탈이 없다는 윤달에 묘 이장을 하거나 수의를 마련하면 병치레 없이 장수 한다고 하여 장만하는 풍습이 있다. 그뿐인가 묘를 잘못 건드리면 지신이 노하여 동티가 난다고 했는데 윤달은 `귀신도 모르는 달'이라 했으니 묘를 이장하는 이들이 많을 터. 누군가는 호황을 누리겠지만 누군가는 훼손으로 아파하는 상반되는 윤달이다.

몇 해 전 부터 화장(火葬)을 생각을 하던 끝에 아예 뜻을 굳히기로 마음먹어 수목장(樹木葬)을 하기로 했다. 반세기동안 걸어온 흔적을 되짚어 한참을 돌이켜 회상하니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 기쁨보다 슬픔 그리고 아쉬운 마음이 먼저 피어오른다. 속물근성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오십대인가 보다. 수목장이라지만 나 역시 유교사상이 온몸에 배어 있는지라 명당을 물색했다. 화장을 하여 뼈를 추려 항아리나 상자 속에 넣어서 땅에 묻거나 납골당에 안치하는 일 또한 묘지 쓰는 일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기에, 나무를 심어 가꾸고 그 뿌리 부분에 화장한 고인의 뼛가루를 묻는 방법인 수목장터도 물색하고 표지석도 디자인해 놓았다.

바람에 흩어지는 꽃잎처럼 심산한 어느 날, 나물을 뜯으러 갔다. 나물은 핑계이고 인근 수목장을 하기로 한 곳을 보고 싶어서이다. 태양을 머리에 이고 밭둑에 엎드려 쑥을 뜯을 때마다 향긋한 흙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고 햇살은 손끝을 따라 오고 있었다.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 이른바 여근곡을 닮은 명당이다. 산세가 계곡을 만들고 그 아래에는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보니 산소가 즐비하다. 백운에 둘러싸인 산봉우리 그리고 청풍이 머무는 여근곡을 닮은 그곳에 우린 준비한 도시락을 펴 놓고 먹었다. 명당이라 그런지 유독 밥맛이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맘때면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 따라 수면위에 부초처럼 떠다니는 하얀 꽃잎들, 기울어지는 산 그림자에 노을을 덧칠하고 있을 여근곡을 닮은 그 저수지, 오늘은 어떤 물밑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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