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날린다
그녀가 날린다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5.1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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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벚꽃이 분분히 날리를 거리를 걷는다. 지난날을 허공에 띄워 놓고 연처럼 날리며 걷는다. 돌아보면 가슴 뻐근해지는 기억들이 싸르르 떠다닌다. 세월의 연줄을 당겼다 놓았다 해본다.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며 하늘에서 날린다. 벚꽃 그늘 아래 그녀를 들여놓고 얼레를 더 많이 풀어본다.

스르륵 스르륵 바람 타고 뒤로 흐르는 시간 속, 대학생인 나와 중학생인 그녀가 벚꽃 가득한 무심천변을 산책하고 있다.

산책길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한 그녀를 따라 나도 들풀들 사이를 쳐다보고 있다. 개불알꽃이 작디작은 꽃잎을 바람에 맡긴 채 하늘색 손을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꽃의 이름을 말하며 웃었다. 열매의 모양이 개 불알을 닮아 그리 불린다는 꽃이다. 너무 작아서 혼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꽃, 그래서인지 꽃들은 푸르게 모여서 피어 있다.

푸른 멍울 같은 작은 군락들이 번지고 번져 눈에 들어온다. 봄까치꽃이라고도 불리지만 개불알꽃이 더 친근하게 들리던 꽃이다. 올해도 벚꽃 아래 천변 여기저기 피어 있다.

그렇게 내게 멍울처럼 남아있던 그녀가 결혼한다고 청주에 왔다. 그리고 그날처럼 우리는 무심천변을 걸었다.

42살에 그녀가 시집을 갔다. 보통 여자라면 자식이 결혼할 나이에 그녀가 결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는 그녀가 결혼했다. 신랑과 동시 입장을 하며 그녀가 결혼했다. 그녀가 인사를 한다. 뚱뚱한 대머리 오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절을 하는 그녀의 눈가 근육이 실룩였다. 벚꽃 향기 분분하게 날리는 봄날이었다. 개불알꽃 푸르게 멍울처럼 번지던 봄날이었다.

내 몸속에 있는 투명한 물관이 꿈틀거렸다. 순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관의 물. 그녀와 함께했던 눈 덮인 빈들 같던 날들이 스쳐서였을까. 까만 밤 흰 눈 위에 새겨지던 어린 두발자국이 떠올라서였을까.

우리의 어린 시절은 마치 뭉크의 그림 같았다. 뭉크의 불안과 절규 그리고 뭉크의 죽음에 나타난 표정과 색체 같던 날들. 어두운 놀이터의 빈 그네처럼 흔들리며 보냈던 날들이 풍경소리처럼 아득하게 가슴에 퍼졌다.

그녀를 보내고 수변 산책로를 홀로 걷는다. 걷다 다시 만나는 버드나무의 옅은 나뭇잎도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거리의 사람들도 봄에 들떠 흔들리며 걷는다. 수변 산책로가 끝날 무렵 반쯤 물에 잠긴 이름 모를 나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돌아오는 길, 봄비가 날린다. 벚꽃이 눈발처럼 날린다. 개불알꽃 푸르게 멍든 손이 파르르 날린다. 봄비 속에 웃던 그녀의 모습이 날린다.

서점에 들러 시집을 몇 권 사왔다. 나도 봄비처럼 꽃잎처럼 그녀의 미소처럼 시처럼 날리고 싶다. 온종일 날리고 놀았던 추억의 연을 돌돌 말아 서랍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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