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의 대명사 정조 임금의 효도 이야기
효심의 대명사 정조 임금의 효도 이야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5.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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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정조임금은 조선시대 22대 왕위에 오른 후 백성을 위해 선정을 펼친 분이다.

효성 또한 지극해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조로 추존했다. 그리고 초라했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융릉이라 이름하고 자주 찾아뵈었다.

하루는 융릉 주변의 소나무가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것을 보게 됐다.

릉 지기를 불러 연유를 물으니 송충이가 너무 창궐해 소나무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고를 들은 정조는 크게 노해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명하였고 신하들은 그 뜻을 따랐다.

릉 지기는 가능한 가장 큰 송충이 몇 마리를 임금에게 대령했고, 정조는 그 중 1마리를 손바닥에 놓고 호통을 쳤다.

“너희들이 아무리 천하의 미물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이냐? 어디 먹을 나무가 없어 릉의 소나무를 먹는단 말이냐” 라고 호통을 친후에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라고 말하고는 그 송충이를 삼켜 버리는 게 아닌가.

설마 임금이 송충이를 먹을까라고 생각했던 신하들이 죽을 죄를 지었노라고 엎드렸고,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 진심으로 존경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후 능에는 송충이가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이 사건 이후에 정조의 효심에 감동한 까마귀 때가 여름이 되면 어디선가 날아와서 송충이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릉을 돌아본 후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 지나게 되는 고개가 있었는데 고개 마루에 다다르기 만하면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묘소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아쉬워하며 “천천히 가자, 천천히 가자”고 했다 한다. 그래서 임금을 태운 가마가 천천히 고개를 넘어갔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은 이 고개를 `더디게, 더디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더딜 지(遲)자를 두번 해서`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조임금이 행차 중 지었던 시를 보면 효심이 얼마나 깊었는 지 알 수 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하지 못해

오늘 또 화성에 왔구나.



부실 부실 비 내리니,

배회하는 마음 둘 곳이 없어라

만약에 여기서 사흘 밤만 잘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네.



더디고 더딘 길

아바마마 생각하는 마음, 흘러가는 구름 속에 생기네.'





아버지께 못다한 효도를 늦게나마 대신하려던 정조의 효성스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다. 정조도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묘소 가까이에 묻히게 되었는데 정조의 묘소를 `건릉'이라 부른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과 건릉이 한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융건 릉'이라고 부른다.

지난 8일은 어버이날이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 오지만 올해는 모든 자식들이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진정어린 효도의 날이 됐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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