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바람이 되어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5.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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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촛불광장에서 희망이 웅성거리더니 암울한 장막을 걷어내었다. 덩달아 수장되었던 괴물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거구의 몸으로 끌려 나왔다. 눈앞에서 본 괴물은 일만 톤의 업을 짊어지고 고개를 처박은 채 죄인의 모습이다. 노란 표상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슬픔은 무거운 발목을 끌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저도 애간장이 녹았는지 꾸역꾸역 동강 난 내장들을 쏟아놓는다. 아이의 흔적을 찾는 어미 아비가 슬픈 희망에 오열하고 있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하는 이들이 비탄의 눈물로 적셔버린 그해 사월과 다시 돌아온 사월은 실로 잔인하다. 저 괴물은 아이들의 눈물로 들어 올렸음이 분명하다. 아홉 명의 이름을 부르는 애절한 팽목항이 슬퍼할 기운조차 없어 먼저 돌아온 아이들이 눈물 한 줌씩 모은 것이다. 수장되었던 괴물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부관참시하려는데 죽은 그가 입을 연다.

“나는 죄가 없으니 죄를 묻지 마시오.”, “그대의 죄가 아니면 누구의 죄이던가?”, “사람의 손에서 괴물이 된 죄밖에 없으니 우리 모두를 판관 앞에 세우시오.”

서슬이 퍼런 괴물 앞에서 우리는 진정 무슨 대답을 하여야 할까. 벌겋게 녹슬어버린 차가운 가슴과 혈관도 없는 괴물, 그대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무너질 것을 예감하면서 다리를 세우고 사상누각을 꿋꿋이 지어내던 그들이 사람이었다고?. 공생의 원리도 모르면서 아는 척 국민과 더불어 살겠다던 그들과 오직 하나밖에 볼 수 없는 외눈박이 우리는 철저한 방관자였다고 어떻게 고백할까.

아이들은 우리의 녹슨 심장을 부둥켜안고 하늘로 올랐다. 속죄양이 되었다. 부패해가는 세상을 더는 볼 수가 없어서 스스로 제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대도 우리도 죄 없다고 우길 일이 아니다. 세월호인 죄, 사람인 죄,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죄.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바람 소리를 들었다. 우우우- 처음엔 흐느낌인 줄 알았다. 하늬바람일까, 서릿바람일까. 귀 기울여보니 아이들이 들려준 천상의 합창이다. 이제 막 태어나 이름도 달지 못한 채 부는 바람이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임형주 세월호 추모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중에서-



바람이 자그락거린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인 듯하다.

`바람을 만나면 그대들인 줄, 눈이 쏟아지면 그대들의 새하얀 웃음소리인 줄 꼭 기억하리다. 언제든 하늘에서도 여기가 그립거들랑 그대들의 귀향이 슬프지 않게 사월의 언덕에다 꽃씨도 뿌려 놓으리다.'

남은 이의 부끄러운 눈물과 떠난 이의 염원을 끌어안은 항구에 바람이 분다. 우리의 녹슨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노란 리본을 달고 바람을 끌어안고 섰다. 슬픔은 품고 있으면 슬픔으로 남지만 슬픔이 승화하면 천개의 바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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