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를 다시 생각한다
`박문수'를 다시 생각한다
  • 권혁두 국장
  • 승인 2017.05.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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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함경도 지방에 북민감은비(北民感恩碑)라는 비석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세워졌다. 북쪽의 백성들이 입은 은혜를 잊지 못해 세웠다는, 이를테면 송덕비다. 비석에서 칭송받은 주인공은 영남관찰사 박문수(朴文秀). 반도의 꼭대기 함경도 사람들이 왜 맨 아랫녘의 경상도 관찰사에게 감사하는 비석을 세웠을까. 당시 영남관찰사로 재직하던 박문수는 영일만 앞바다에 가재도구와 관(棺) 등이 대량으로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함경도 지방에 큰 홍수가 났음을 직감했다. 즉시 감영의 창고를 열어 함경도에 구휼미로 쌀 3000석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하들이 조정의 승인 없이 나라의 양식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나중에 호된 문책을 당할 것이라며 난색을 표하자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내가 징계를 받는 것은 사소한 문제지만,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때 도움을 받은 함경도 주민들이 고통받는 백성의 구제를 국법에 우선했던 박문수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북민감은비다.

대선 후보들은 롤모델로 이순신과 세종을 꼽았지만, 뒤지지 않을 인물이 박문수다. 그는 암행어사로 많이 알려졌지만 호조판서와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맡아 균역법을 개정해 서민의 고통을 더는 등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대선 후보들이 박문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는 시책을 구상하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가능한 방법론을 창안하고 성과를 일궈낼 때까지 앞장서 추진했다. 소금을 구워 이재민 구호예산을 조달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삼남지방에 가뭄과 역병이 돌아 이재민이 대거 발생하자 박문수는 조정에 즉각적인 구호대책을 촉구하고 파격적인 재원 확보 방안까지 내놓는다. 왕실이 관리하며 왕족의 주머니를 채워주던 전국의 소금공장을 국가 관리로 전환하고 발생한 수입으로 이재민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그는 주장을 관철했고, 더 나아가 소금공장 운영을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대신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소금장수'였다. 박문수는 6개월 만에 소금 3만6000석을 생산해 큰 수입을 올렸다. 소금을 팔아 이재민들에게 전달한 쌀이 7만석에 달했다.

고관들의 녹봉을 깎아 구휼미에 보태자는 주장도 펼쳤다. 역시 반대가 거셌지만 영조는 그의 제안대로 직급에 따라 녹봉을 삭감하는 조치를 강행했다. `노총각 노처녀 시집장가 보내기'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저출산 문제로 고심하는 지금 우리의 처지를 감안할 때 선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박문수의 성취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조의 리더십이다. 영조는 인재를 감별해 등용하고 소신껏 일하도록 후원했다. 박문수는 다혈질에 고집불통이었다. 영조 앞에서 다른 대신들과 언쟁을 벌이기 일쑤였으며, 왕이 말려도 멈추지 않다가 효수형을 당할 뻔한 적도 있다. 실록에는 영조가 박문수에게 “경의 병은 그 고집이다”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온다. 툭하면 심기를 거스르는 박문수였지만, 영조는 왕실의 돈줄을 회수하고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자는 그의 과감한 제안들을 적극 수용했다.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한 번 눈을 씻고 부릅뜰 때다. 그간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라가 처한 위기가 일반의 생각보다 넓고 깊다는 점이다. 후보 토론회에서 제기된 국내문제만 꼽더라도 실업과 양극화, 비정규직, 고령화, 가계부채, 보육난, 저출산에서 미세먼지에 이르기까지 열 손가락도 모자랄 정도다. 북핵과 사드, 종군위안부 등 외교와 국방 문제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방불한다. 다른 한 가지는 후보들에게서 이 난마(亂麻)를 풀어나갈 쾌도(快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방향은 있지만 방책은 부실한 미덥잖은 공약들이 유권자의 기대감을 반감시켰다. 정책대결 대신 비방과 험담에 승부를 걸고 있지만 수준은 시대착오적이고 졸렬하다.

이들에게서 백성의 고통 앞에서는 법도 왕도 없었던 박문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자신에게 무례를 범해 목을 치려던 사람조차도 능력을 아껴 기용한 영조의 대범한 인사 철학을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도 후보들에게서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최선의 차선은 박문수나 영조에 가장 근접할 인물 찾기를 숙제로 삼는 것이다. 내일 투표장에 들어갈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될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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