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완 홍범식 선생
일완 홍범식 선생
  • 김홍숙<문화해설사>
  • 승인 2017.05.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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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던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일완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1910. 8. 29)-

홍범식 선생의 자는 성방(聖訪)이고 호는 일완(一阮)이다(1871~1910) 성균시 급제자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 태인군수, 금산군수 시절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비분에 자결했으며 유고 문집으로 [일완시고]가 있다.

일완은 어려서 성리학 공부를 하며 충효의리와 절의를 최고 덕목으로 익혀 실천하였다 한다. 학문을 좋아하여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였다.

진사시에 합격,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 등 관직을 거쳐 1907년 태인군수에 부임했을 때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백성들을 의병으로 몰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없도록 수비대장들을 설득했으며 황무지 개척과 관개사업에 힘쓰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909년 금산군수 시절에는 그곳에서도 국유지로 몰수될 뻔했던 백성들의 개간지를 돌려주도록 주선하는 등 선정을 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또한 일완 홍범식 선생은 태상황(太上皇) 고종의 생신을 기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탄(倂呑)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 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탄식하고 순사(殉死)를 결심하고 유서를 준비한다. 을사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민영환이 그에 항거하여 자결하자 평소 그를 존경하던 중 마침내 경술국치를 당한 1910.8.29일 저녁 그는 사또가 망궐례를 행하는 곳인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자결하였다. 객사 안의 벽에는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國破君亡 不死何爲)”라는 여덟 자의 유언이 적혀 있었다. 자결 당시 일완은 향년 40세였다. 장례는 전 군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히 치러졌는데 부의(賻儀)를 한 사람만도 5000명에 달하였다.

발인 날에는 온 고을 사람들이 나와 분향하고 통곡했으며 장례 행렬이 괴산 선영을 향할 때 100여 명의 백성들이 300리나 되는 길을 따라갔다.

괴산군 제월리에 홍명희의 생모 은진 송씨와 합장하였다.

경술국치 후 제일 먼저 순국한 홍범식의 최후가 나라 안에 알려지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정부 고관으로부터 유생. 화관. 평민 등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순국하는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해방 후인 1949년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금산군 내에 `군수 홍공(洪公) 범식 순절비'가 세워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괴산군에 `의사 홍공 범식 추모비'가 세워졌다.

일완은 자결하면서 10여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일완의 조모, 부친, 처, 장남인 벽초 홍명희와 8세이던 장손 홍기문 등에게 남긴 것이었다.

벽초는 일생 동안 애국의 지조를 지켜 순국한 부친을 자랑으로 여겨왔고 조선민족으로서의 도리와 의무를 다하라는 부친의 마지막 유언을 깊이 명심하여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부친의 유서를 책상 앞에 걸어 놓고 조석으로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아 어제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깨끗하게 살려고 애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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