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선생 고택과 풍산홍씨 일가 ①홍범식 선생 고택
홍범식선생 고택과 풍산홍씨 일가 ①홍범식 선생 고택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7.04.3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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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안채 마당에는 잡목이 우거져 어수선하고 단풍나무가 있던 기억이 있다.

안에서 문을 여는 촌로의 지친 모습이 보인다.

300여 년 된 이 고택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분 이복기옹이다. 그의 부친은 참봉을 지냈다고 전한다. 그만큼 이 고택에 기거한 사람들은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한다.

빈집임에도 넓은 마당과 사랑채, 안채, 행랑채에서 손님들이 왁자한 말소리와 분주한 모습들이 보이는듯하다.

이 가옥은 조선 선조 때 김 정승이 지었다고 전한다. 1860년대부터는 `홍판서댁'이라고 불리게 된다. 지붕에서 [雍正8年4月]이라는 기와의 명문이 발견되어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는 유서 깊은 고가이다.

홍우길 일가는 조상 대대로 서울 북촌에서 살았고 선산은 경기도 파주에 있었다. 괴산 제월리에 선산을 새로 마련하면서 노후의 근거지로 삼고자 인산리의 저택을 사들였다.

건물의 안채 구조는 정남향으로 지어졌으며 전체적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ㅡ'자형 광채를 한 단 낮게 하여 광채의 지붕이 안채의 아래로 이어져 있다.

평면상으로는 몸채에 전퇴를 달고 나머지는 맞배집으로 하였으며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좌측에 자리한 사랑채의 구조는 2고주 5량가이며 장혀를 받친 납도리집이다. 지붕은 합각으로 처리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를 이루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하였다.

당시 이 가옥의 소유자였던 홍명희 선생은 이 사랑방에서 1919.3.19. 괴산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였다고 전한다. 고종황제의 국상만 보고 오겠다고 일제의 허락을 받고 상경한 벽초 홍명희 선생은 이미 전국적으로 퍼지는 만세 운동을 접하게 된다.

귀향한 벽초는 이 사랑채에서 벗 이재성. 김인수. 숙부 홍용식. 아우 홍성희와 괴산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한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조선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독립선언서를 손수 집필하여 밤새 등사판으로 수백 장의 유인물을 제작하여 장터에서 나누어 주면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취지로 연설하며 선동하게 된다.

이에 군중, 학생 7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따르게 되고 일본 경찰은 주모자를 검거하고 국기와 유인물을 압수한다. 그러나 이 괴산 만세 운동은 충북 최초의 운동으로 각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점점 더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근대 역사소설의 이정표가 된 [임꺽정]의 작가 벽초의 생가로 널리 알려진 문학사적 유산이자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일완 홍범식 선생의 고택인 이 가옥은 1984년 중요 민속자료 제146호로 지정된다. 이후 1990년 일부 건물이 없어지고 훼손되어 문화재 가치 상실로 지정 해제되었던 것을 2002년 괴산군에서 매입하여 보수하고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다시 지정하게 된다.

안채, 사랑채, 광채 등 3동만 남아있던 것을 2002~2008년까지 멸실 건물 5동 및 화장실, 뒤주 등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광채 옆에는 초기에 쌓았던 담장을 볼 수 있고 오얏나무도 있다. 오야는 성이, 오얏이를 의미하는 과실나무로서 천안 독립 기념관 정문에는 오야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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