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왈츠
바람 왈츠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4.2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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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헉, 신호등이 갑자기 바뀌었다. 급브레이크를 잡고 간신히 섰다. 초록색 신호여서 충분히 지나갈 줄 알고 달리던 중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신호가 끊기고 정지하게 될 줄 내 계산에 없었다. 차안에서 신호대기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나를 보았다. 걱정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건강 신호등의 빨간불에 걸려 오두망찰 서있는 모습이다.

쉰둘의 봄날 갱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남들은 열이 오르고 체중도 늘어난다고 한다. 우울증 증세도 같이 따라온다고 하여 미리 걱정했었다. 다행히 나의 증세는 사춘기에 앓는 몸살처럼 왔다. 봄을 많이 타서인지 어느 해보다도 더 몸이 달았다. 상처가 난 곳에 새살이 돋듯이 간질간질하고 설레임이 나를 들뜨게 했다. 이런 봄으로 왔다.

정작 갱년기는 순하여 걱정이 아니건만 전혀 염려한 적이 없는 혈압이 나를 겁 줄줄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고혈압은 나를 당황시킨다. 170이 넘는 나를 보며 의사는 갑자기 신경 쓸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살면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써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 모르는 사이에 써졌는가 보다. 약을 처방해주면서 생활처방을 같이 주었다. 첫째로 운동이다. 또 체중을 줄이고 금연과 금주, 고기위주의 식단을 피하라고 한다. 이 중에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운동밖에 없다.

고혈압은 갑자기 일을 낼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 아닌가. 자신도 힘들지만 주위에서 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는 질병이다. 생각만 해도 우울하고 속이 상해 온다. 퇴근 후에 음성천을 돌기로 했다. 해이해지는 나를 다잡아서 걷는다. 사람들은 살을 빼려고만 운동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아는 이들은 무슨 뺄 살이 있다고 운동을 하느냐고 말한다. 내 속을 모르는 야속한 사람들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잃는 게 자연의 이치라더니 체중이 줄기 시작한다. 지금도 저체중인데 적잖이 고민이 된다. 체중은 잘 먹으면 될 일이라지만 내게는 혈압이 더 무섭다. 차라리 몸매관리를 위한 운동이라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얼마나 기쁜 일일지. 오히려 그들이 부럽다. 언제 터질지 몰라 무서워서 하는 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둑길로 올라섰다. 길가에 벚꽃의 꽃잎이 날린다. 팝콘같은 꽃잎이 꽃비로 내리면서 마치 왈츠를 추는 듯하다. 사뿐히 내려앉는 모양은 우아한 춤사위다. 그러다가도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경쾌한 리듬이 된다. 사람들은 꽃잎의 화려한 낙화에만 홀려 감탄사를 내뿜는다. 온전한 꽃잎만의 단독콘서트로 알고 있는 눈치다.

지면서도 저리 우아한 모습일 수 있는 벚꽃에 취해 멈추어 서서 위를 올려다본다. 저 꽃잎을 춤추게 한 것은 바람이었다. 후드득 떨어지고 말일을 바람이 추는 왈츠에 소품이 된 꽃잎은 꽃비도 되고 춤도 된다. 꽃잎이 떨어지면서도 슬퍼 보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바람덕택이다.

나도 남들에겐 부러움으로 보인다. 살을 빼려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의 우울함은 감추어져 보이는 대로라면 날씬한 여자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함으로 비춰질 것이다. 나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음성천을 걸을 것이다. 빈정댈지도 모르는 이들의 눈길을 은근히 즐기면서 말이다.

내가 꽃의 왈츠에 숨기어진 바람을 처음부터 보지 못하였듯이 사람들도 내속의 고민을 모를 터이다. 꽃에게 왈츠를 추게 한건 바람이었다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을 작정이다.

바람이 불어온다. 한바탕 바람이 왈츠 한 곡으로 꽃잎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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