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와 없다
있다와 없다
  • 이영숙<시인>
  • 승인 2017.04.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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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

꽃망울 수줍게 터지는 봄날, 진천 만뢰산 계곡을 찾았다가 끼룩끼룩 가냘프게 우는 암컷 북방 개구리를 만났다. 수컷 개구리가 짝짓기할 암컷 개구리를 찾느라 운다는 일반 상식이 무너지던 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면 과잉행동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진리란 무엇일까. 상식이 깨진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보통 지식조차 얼마나 인위적이고 조작된 것인지 동행한 전문가의 설명에 무지한 속인은 탐사 내내 자연 그대로를 바라보며 “아하! 그렇구나, 그러하였구나. 이것들은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있는 무위적인 것들이로구나.” 수식을 절제한 단조로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자연에서 도를 찾은 초나라 사상가 노자의 무위자연을 비로소 온전히 터득한 날이다. 자기들 스스로 존재하는 `自'이고 늘 그러한 모습을 하는 `然'이다. 노자는 유가에서 내세운 명분주의와 인위적인 조작에 반대하고 無爲自然에 처할 것을 주장한 사상가이다. 이날은 오랜 세월 우리가 상식처럼 학습한 유가의 공자적 지식에 심한 회의가 든 날이다.

자연의 섭리를 모르고는 뻐꾸기를 야비한 탁란(托卵)의 대명사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늑대를 초원의 양을 해치는 포악한 동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뻐꾸기의 역할, 구렁이의 역할, 바퀴벌레의 역할, 봄바람의 역할까지도 스스로 그러한 것이면서 에너지 피라미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무위적인 것들이다.

물과 숲에서 도를 찾은 노자, 도는 빛깔도 소리도 형태도 없어서 잡기 어렵다고 했다. 살면서 안다고 하는 것들, 정의라고 명명한 것들이 얼마나 허술한 인식들인가. 개구리는 수컷이 울고 북방 개구리는 암컷도 운다는 이 기준 또한 얼마나 조작적인가. 가끔은 날 것과 무봉의 무위로 흐르고 싶을 때가 있다.

돌아오는 길, 생각이 많다. 어디까지인가, 우리 보편 다수가 규정해놓은 상식과 가치라는 것은. 공자의 보편적 가치는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주관성이 깊어 자칫 이분법의 오류와 소외를 낳고 노자는 있고 없음의 유무 상생을 주장하며 보편적 가치나 규준을 무시하며 범 우주론적 사고로 확장한다.

부자는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배웅하고, 선비는 말로써 사람을 배웅한다 한다. 총명한 사람이 자칫 죽을 고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남의 행동을 잘 비평하기 때문이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자주 위험한 고비에 부딪히는 것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식도 이다, 아니다,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의 총합이라면 지극히 인위적인 것들의 총합이며 기득권 중심의 갑질인 것이다.

개구리는 수컷이 운다. 그러나 북방 개구리는 암컷도 운다며 개구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울음을 들려주는 자연안내자, 징그럽다는 표정도 짓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귀를 갖다 대었다. `끼룩끼룩'개구리가 소리를 낸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르지만 북방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 인간이 보는 개구리와 개구리가 보는 인간의 시선이 수평으로 흐른다. 인간의 시선으론 아무것도 아닌 개구리 한 마리가 이다 와 아니다, 있다 와 없다는 한 몸이라며 노자처럼 다가온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큰 우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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