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퇴직
이른 퇴직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4.19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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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15년 다닌 연구원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간 사람이 있다. 글에서야 그가 직장을 관두었다는 것을 알았다. 도반으로 여러모로 의지하던 이였는데 소식에 깜짝 놀랐다. 6년을 앞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명예퇴직제도도 없다는데 과단성 있는 결정이었다.

학위 후 안동의 국학연구원에서 15년을 살고, 고향인 강릉으로 일찌감치 이주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쓴 글이, 퇴계의 안동과 율곡의 강릉에서 일생을 보내게 된 감회를 적은 것이었다. 안동에서 고향을 갈 때 탄 국도가 35번이었는데, 퇴계와 율곡의 나이 차도 35세란다. 둘이 만난 것은 퇴계와 율곡이 각각 58살과 23살이었던 1558년 봄 안동에서였는데, 그분은 퇴계의 고향을 떠나 율곡의 고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퇴임 후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결정이라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글을 보자마자 전화를 했더니 `횟값이나 들고 언제든지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한 사모님의 너그러움에도 찬사를 보낸다. 근처 작은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받았다니 심심치는 않을 것 같다. 딸내미들 보러 서울에서도 대학원 강의 하나를 맡았다니 가족 우애도 깊어질 것 같다.

16살 때 사임당이 죽고 율곡은 3년 시묘 후 금강산으로 출가한다. 1년 뒤 환속하였지만 그 전력 때문에 평생 정치적으로 약점을 잡히기도 했다. 이후 과거시험 아홉 단계를 모두 수석으로 통과한 구도장원(九度壯元)의 야심 찬 젊은이는, 50세 후반에 벼슬에서 물러선 퇴계와는 달리, 끊임없이 학문의 실천을 꿈꾸다가 후학을 양성하는 데는 실패한다. 적어도 퇴계와 비교해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미래가 아닌 자신의 일생을 `멀리 생각하는 데'(원려遠慮)에는 퇴계가 율곡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퇴직한 그분 말마따나, 퇴계는 `사람들'을 준비하려 했고, 율곡은 `제도'를 바꾸려 했다. 퇴계는 19세 때 조광조의 이상이 꺾어지는 기묘사화를 비롯하여 45세 때는 을사사화, 17세 때는 양재역 벽서사건 등 좌절의 경험을 한 후 일찍부터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한 인재양성에 희망을 두었다면, 재능 많은 율곡은 스스로 현실개혁의 꿈을 제도를 통해 뒷받침하려 했다. 과연 누가 옳단 말인가?

강릉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는 영남학파에서 기호학파로 이적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철학적 여정을 택한 것뿐이다. 그러나 삶의 태도 면에서 그의 길은 율곡의 길이라기보다는 퇴계의 길인 것 같다. 퇴계가 물러설 나이 즈음에 그도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면대한 고향의 황량함에 더욱 분기탱천할지도 말이다. 경상도 정권의 화려함에 이루어진 퇴계학의 흥성만큼이나 율곡학도 부흥할 수 있는지 고민할 것이다. 우선은 전공했던 학문의 뒷정리에 바쁠 테지만 그 이상의 요구가 그에게도 다가올 때 어떻게 대응할까 궁금하다.

강릉 오죽헌에는 율곡학회가 있다. 강원도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단법인 단체인데 나도 이사라서 함께 어울리고 있다. 이제는 가까이에 있는 그가 거기서 놀아야 제격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아무도 모른다.

말 나온 김에 안타까운 것 하나. 후율(後栗)이라함은 율곡의 정신을 후대에 잇겠다는 의지의 표시인데, 바로 그 후율의 거장인 우암 송시열이 충북에서는 생각만큼이나 관심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시와 도에서도 지원받지 못하는 우암연구소가 충북대학교에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안동, 강릉이 문화도시인 만큼 청주도 문화도시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율곡이 청주목사를 했던 것을 아는지? 그때 소나무 심은 것을 기념하는 비석(율곡선생수식송, 1886, 고종 3년)만이 휑하니 남아있다는 걸 아는지? 나무가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얼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닌지?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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