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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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4.1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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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패기가 넘친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무당벌레에게서 나는 소리다. 낮은 포복으로 집안 곳곳의 먼지를 빨아들이고 다닌다. 비좁은 틈도 헤집고 들어가 꼼꼼히 청소를 하는 게 내 마음에 쏙 든다. 어쩌다 무리하게 좁은 틈을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고 발버둥을 칠 때도 더러 있다. 네 발을 헛발질만 하고 있는 녀석을 번쩍 들어서 장애물이 없는 편편한 곳에 놓아준다. 옹고집이다. 다시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 제 양에 차야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로봇 청소기는 선물로 우리 집에 들어왔다. 직장을 다니는 처지를 잘 아는 막내 올케의 고마운 배려다. 이름을 붙여주었다. 돌돌이다. 돌돌이를 보고 있으면 그이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틈에 끼여 바동거리는 모습은 화가 나면 그 화가 풀릴 때까지 성질을 부리는 영락없는 그이다. 고집도 닮아있다. 아마도 돌돌이는 B형인가 보다.

드럼세탁기를 돌리다가 중간에 빠트린 양말을 더 넣으려고 문을 열어보지만 열리지가 않는다. 탄력성이 없어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한번 결정을 내린 일은 다시 번복하는 일이 없는 나. 일 더하기 일은 이밖에 모른다고 그이는 불만을 털어놓는다.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나처럼 세탁기는 O형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집에서 청소기와 세탁기가 제일 고맙다. 손목에 힘이 없어 빨래하는 것이 겁나고 날마다 청소하기 힘든 나를 대신해 수고해주니 얼마나 기특한 것들인가. 자세히 보면 가사 일은 기계가 대신해주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남자들을 폄하하는 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삼식이 시리즈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가족들을 위한 희생이 분명 있었건만 그 고마움은 사라지고 귀찮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졸혼이란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바람 부는 날의 산불이 번지듯 한다. 나도 이 말에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결혼해서 콩깍지가 벗겨지는 기간이 3년이라고 한다. 몇십 년을 살면서 어찌 사랑으로만 살 수 있으랴. 정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아니 오래된 부부는 의리로 산다는 말도 있다.

한 방송에서는 졸혼에 대해 시끄럽고 또 다른 채널에서는 금혼식을 올리는 연예인을 보여주고 있다. 동전의 양면을 놓고 무엇이 옳은지는 시청자의 몫이다. 어느 책에서 아내란 청년에겐 애인이고 중년에는 친구이며 노년에는 간호사란 글을 보았다. 네팔에서는 나이가 들어 부부관계가 원숙해지면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와 그이는 나이가 같으니 세대차이가 없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잘 통하기도 한다.

쉰을 넘어서자 그이의 보이지 않던 주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머리는 올이 빠져 휑하다. 시큰하다. 측은지심(惻隱地心)이 울컥 넘어온다. 카랑카랑하던 성질도 누그러지고 기운이 없어하는 그이가 이제야 보인다. 내 갱년기만 요란하게 소리 내었다. 동갑인 그이의 갱년기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남자들도 올 수 있는데 말이다.

지금 사계절 중 가을을 걷고 있는 우리 부부. 상대방을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바라볼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각자의 구속을 헐렁하게 풀어주며 서로 의지하며 늙어가고 싶다. 언제나 보면 편하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친구. 평생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황소고집인 B형인 남자와 융통성이 없는 O형의 여자가 해혼(解婚)을 한다. 그리고 한집에 사는 친구가 된다. 내가 바라는 부부상이다. 그이의 반응이 궁금하다. 아마도 고지식하여 결혼은 결혼일 뿐이라며 노발대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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