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의 방자함
선입견의 방자함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4.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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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최명임

현금지급기 위에 지갑을 두고 갔다. 두둑한 것으로 보아 소중한 어딘가에 쓰여 질 돈 같았다.

한 박자씩 느려져 가는 이의 기억 장애인지 초고속 변화에 쫓기는 이의 초조함인지 잠깐 생각을 놓쳐버렸을 게다. 2층 은행 창구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둘러보니 은근슬쩍 챙겨 인면수심이 되어도 감쪽같을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벌름거렸다. 혹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행동으로 옮기는 날에는 주인이 생병이 날 것이 분명했다.

마냥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은행 창구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지갑을 손에 쥐고 주인과 마주치면 선의는 무시되고 영락없이 도둑으로 오해받을 일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해도 오히려 구차한 변명으로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돌아서려는 찰나 젊은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지갑을 들고 황급히 나가는 그녀에게 지갑을 지켰노라고 창구에 맡길 작정이었다고 말할 새도 없었다. 묘한 표정에 순간 당황했다. 그때 자신이 뛰어들지 않았으면 도둑맞을 뻔했다고, 절묘한 순간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원칙에 얽매이면 사고의 전환이 어려워진다.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것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까. 은행 창구에 전화해서 상황 설명을 하거나 창구에 맡겨두겠다고 메모를 써 붙여도 될 일이다. 미련함이 오해의 소지를 만들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하고많은 나무를 두고 왜 하필 그날 그 배나무였을까. 달수가 차서 스치는 바람에도 떨어질 배였는데… 흉조라는 선입견에 진위도 모른 채 도둑누명을 씌웠으니 꺼먹새는 지금도 억울함에 꺼억꺼억 울어대나 보다.

오해는 일방통행이어서 불통이다. 잠깐의 대화라도 나누었더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졌을 게다. 지금도 마음이 찜찜한 것처럼 그녀도 절묘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가끔 가슴을 쓸어내리지는 않을까.

오해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고 그것에 비추어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갑 앞에서 서성인 나를 보는 순간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눈빛과 표정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켜 내 눈에 들어왔고 나를 오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굳이 풀어야 할 오해도 아닌지라 주인이 지갑을 찾은 것에 만족했다.

오해란 단어는 듣기만 하여도 살천스럽다. 신뢰를 한순간에 단절시키는 삐뚤어진 시선과 서늘한 세 치 혀를 가지고 있다. 사소한 오해는 스쳐가는 작은 바람이지만 그것에 날개를 달면 휘몰아치는 태풍의 난이 될 때도 있다.

얼마 전 영월에 있는 장릉에 다녀왔다. 어린 왕의 누운 모습이 애달파 울컥했는데 조카를 귀양지에 묶어놓고도 불안했던 수양은 그 서늘한 세 치 혀로 사약을 내렸다. 또한 당쟁의 희생물이 된 사도세자를 향한 영조의 비뚤어진 시선은 뒤늦은 회한으로 눈물을 쏟게 했다지 않은가.

세기의 사건을 들추지 않더라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매 순간 일어나는 사건 뒤에는 오해로 인한 불신이 그물처럼 얽혀 있다.

선입견을 배제하고 다시 바라보니 내 눈에 비친 그녀는 단지 놀라서 황망한 모습이다. 그녀 눈에 비친 나는 행인에 불과할 것이다. 선입견은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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