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이되 풋내나지 않는 - 이은미의 열창
날 것이되 풋내나지 않는 - 이은미의 열창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4.16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청주 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천년각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나는 숨죽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차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아내에게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공연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감동을 표현했다.

이은미! 그가 한국인이고 한국말로 노래하며, 특히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가. 그녀로 인해 위로받을 수 있고, 그녀를 통해 영혼이 맑게 씻어지는 시간을 누릴 수 있음은 축복받은 일이다.

지난주 <수요단상>에서 나는 `세상은 결코 겸손하거나 진지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리고 금요일 밤, 청주예술의전당을 빠져나오면서 겸손함과 진지함이 얼마나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가를 새삼 느끼며 부끄러웠다.

이은미의 노래는 부드럽다. 그리고 처연하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별리(別離)와 애절한 사랑(결코 남녀상열지사에 국한되지 않는)을 그토록 간절하게 읊조리는, 그리하여 처연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힘을 가진 가객(歌客)이 이은미 말고 또 누가 있을 터인가.

그날 이은미 콘서트는 날 것(The Live)이되 풋내가 전혀 나지 않는 잘 숙성된 드라마였다. 공연 중에도 끊임없이 음질을 체크하는 세심함으로 함께 한 뮤직 세션들의 연주는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장르를 넘나드는 절창(絶唱)은 공연 내내 소름 돋는 감동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은미는 높은 옥타브를 내지르며 고음의 가창력을 마구 휘두르지 않는다. 그 대신 끊어질 듯, 숨넘어갈 듯 소리를 다스리고 어루만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웅변보다는 침묵이 함성보다는 고요가 가져다주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은미 콘서트 The Live는 대형 LED모니터라는 흔한 시각적 도움을 무시한다. 무대 뒤편에 간혹 희미한 영상을 투사하기는 하지만 보는 것에 정신 팔려 정작 듣는 일에 소홀해지지 않는 배려가 돋보인다.

거기에 조화를 이루는 절묘한 조명연출은 밝음과 어둠의 대칭과 더불어 투사와 반사를 통한 인간 내면의 울림을 자극하는 보조재로써의 기능에 충실하다.

광고인 박웅현은 그의 책 <여덟단어>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아모르 파티(Amor fati).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은미, 그녀의 공연은 진지하며 겸손하다. “필연적인 것은 단순히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니체는 “나는 사물에 있어 단편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은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이은미에게, 그리고 또 우리에게 영혼 이입된다.

마리오네뜨로 단순화하면서 꼭두각시를 마다하지 않는 이은미를 통해 얻은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에 대한 죽비는 복음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브레히트의 말이 절실한, 이은미의 콘서트 The Live는 변증법이며 우리의 절절한 한(恨)이다. 세월호 푸른 배와 노란 리본,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위로하고 풀어내는 부활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