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없다
경계는 없다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4.1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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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 권재술

먼 별에서 지구를 방문하는 우주인을 생각해 보자. 태양계에 진입한 그들에게 지구는 아주 작은 점으로 보인다. 점차 가까이 접근하면 지구는 탁구공 크기로 보이고, 좀 가까이 오면 테니스공 크기, 더 가까이 오면 농구공 크기로 보인다. 아직 지구는 완전한 구이고 표면은 아주 매끄러운 면이다. 하늘과 땅은 칼로 자른 듯 경계가 분명하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하면 구름이 보인다. 구름 사이로 유라시아 대륙, 아프리카 대륙, 아메리카 대륙들이 보이고 태평양, 대서양도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구의 표면은 매끄러운 구면이고 구름이나 대륙과 바다는 구면에 묻은 얼룩 정도로 보인다. 아직 하늘과 땅의 경계는 분명하고 매끈하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하면 아마존 강, 히말라야 산맥 등이 보이고 지구의 표면은 약간 굴곡이 있어 보인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하면 산과 골짜기 평원과 실개천도 보일 것이다. 이제 바다는 출렁이고 땅은 거칠어진다. 지구의 표면은 더 이상 매끈한 구면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아주 복잡해진다. 이제 우주인이 땅에 발을 딛게 되면 동그랗고 매끈하던 지구의 표면은 사라지고 엄청나게 거칠고 복잡한 구조가 나타난다. 좀 더 땅에 가까이 접근해 보면 어떨까? 돋보기로 땅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들이 곰실곰실 기어다니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미경이라는 더 첨단 장비로 들여다보면 어떨까? 땅은 더 이상 땅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사라지고 만다. 땅은 더 이상 땅이 아니고 하늘은 더 이상 하늘이 아니다. 땅속에 하늘이 있고 하늘 속에 땅이 있다. 땅이 하늘이고 하늘이 땅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경계라는 것이 하늘과 땅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의 경계는 멀리서 보면 분명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호해진다. 국경선도 마찬가지다. 중국 쪽 압록강에서 한 발자국만 건너뛰면 북한인 곳이 있다. 미터 단위로 보면 경계가 분명할지 모르지만 센티미터 단위로 보면 모호해진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남해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다. 그렇다고 동해의 해안선 굴곡이 덜 심한 것도 아니다. 얼마나 자세히 보느냐에 따라 해안선의 굴곡은 그 정도가 달라진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호해지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도 마찬가지다. 1392년 8월 5일은 조선왕조 건국일이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국한 조선 건국!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다. 하지만 1392년 8월 5일, 바로 그날에 살았던 조선인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조선의 개국을 알았을까? 아직도 공민왕을 임금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이성계를 임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뒤섞여 있지 않았을까? 이와 같이 역사적 사건도 멀리서 보면 분명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호해진다.

우리는 사물을 구별하여 본다. 생물과 무생물, 동물과 식물, 짐승과 물고기, 나무와 풀, 나와 너, 물질과 정신,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행과 불행, 진보와 보수 등. 하지만 이런 구분은 절대적이지 못하다. 자세히 보면 이 모든 경계가 모호해진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경계가 이렇게 모호하다는 것은 세상만사와 세상 만물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통합된 하나를 인간의 분별지심이 갈라놓는 것이다. 분별지심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더 깊이 이해하고 나면 이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계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경계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념이다. 모든 갈등은 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다. 이 허구인 경계를 없애면 갈등도 없어질 것이다. 너무 낙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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