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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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7.04.0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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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같은 볕인데도 더 따뜻한 곳이 있는지 음악실 옆의 벚나무가 가장 먼저 꽃 폈다. 검은 가지마다 꽃눈이 터져서 하얀 꽃송이가 바글바글 구름이 되었다. 어느새 나왔구나. 하룻밤 사이가 아니라 그동안 속이 꽉 차도록 꾸준히 자라고 있었음을 새삼 생각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도 그렇다. J고에서 1학년 담임을 하였을 때다. 첫 시험을 치른 후 성적이 가장 낮은 학생 다섯을 교무실 한쪽 방으로 불러 열심히 공부하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해주었다. 교사로서 그 발상과 방식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중에 중희가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희는 야간 자율학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것도 아니고 `그냥'이었다. 무단으로 나가는 적도 없지만 공들인 설득에도 지는 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후엔 요리학원에 다닌다며 자율학습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외의 문제는 없었고 오히려 야외 청소를 하는데 비질을 시원스레 잘한다는 평가가 있었다. 별거 아닌데도 여러 교사가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해 시월에 나는 수업 연구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수업 내용은 천문학 부문으로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다. 제법 넓은 과학실에 이천 지역 각 학교에서 온 과학교사로 꽉 찼다. 행성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태양 둘레를 돌고 있어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과 행성의 위치 관계가 달라짐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긴장은 여전하였지만, 점차 참관인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 반 아이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손재주 좋은 성복이가 만들어 준 모형으로 행성들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회전하는 턴테이블에 행성 모형을 붙이고 가운데에 전등을 붙여 태양이 빛나도록 한 것이었다. 행성이 언제 어느 쪽 하늘에 어떤 모양으로 관측될 것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수업의 절정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 저 끝에서 중희가 상체까지 일으키며 손을 번쩍 높이 들었다. 정말 의외였다. 놀랍고 반가운 나의 목소리, 친구들의 호응에 중희는 앞으로 나와서 그 시간의 수업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훌륭하게 증명했다.

나의 만족과는 별개로 수업은 엉망이었다. 계획한 분량이 너무 많아 종료종이 울린 후에도 한참이나 수업을 더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으로 나는 아이들이 보여준 집중과 열정에 감동했고 교구는 아이가 직접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정말 뜻하지 않은 아이가 선뜻 손을 들고 발표를 했다며 흥분하여 평가회에서도, 만찬에서도, 퇴근길에서도 내내 행복감에 쌓여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야 부끄러움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덮쳤다. 많은 교사를 모셔놓고 잘 구조화된 수업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미리 더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한 점이 그제야 부족한 점으로 생각되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3학년이 되자 중희는 지신이 되었다. 지신이란 지구과학의 신을 의미한다. 지구과학 수업시간은 중희의 무대였다. 우직한 매력이 빛을 발하며 여자 친구도 생겼고, 작은 눈이 자신감으로 반짝였다. 그야말로 중희의 전성기였다. 대견스러운 마음에 지구과학 교사를 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 여러개의 요리사 자격증에, 수능에서 지구과학Ⅰ과 지구과학Ⅱ의 두 과목을 1등급 맞으며 전문대 호텔 조리학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당시엔 요리사의 인기가 이 정도로 치솟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얀 모자와 셰프 옷을 입고 `그냥 좋아서'요리하고 있을 청년 중희를 어느 날 TV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비질과 지구과학과 요리의 관계처럼 벚꽃과 중희가 무슨 연관인가. 온종일 그냥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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