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것들
숨겨진 것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04.0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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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괜히 참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날이라도 잡은 것처럼 우산도 없었지만, 우산이 있어도 쓸 만한 형편이 아니었지요. 두툼한 서류 파일의 껍데기를 우산 삼아 머리 위에 지붕을 만들고는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만큼 몸의 움직임은 빠르지 못했습니다. 육상선수 출신도 아닌데다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내달린다는 게 그리 만만하진 않은 일이었죠. 하이힐의 뾰족한 굽을 힘찬 말발굽처럼 사용했지만, 온몸은 너무도 쉽게 축축해지고 말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은 진득한 늪에 빠져버린 사슴의 발처럼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지요. 그래도 다시 뛰었습니다. 빗방울이 정체를 알 듯 말 듯한 타인들이 쏜 화살들처럼 온몸에 박혔지만, 다시 뛰었습니다. 800 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무실에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었지만, 거기서 버텨내야만 생업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멈추면 인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초라해지고 말 테니까요. 날마다 엄마를 기다리느라 잠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굿나잇'인사를 할 때 미안한 마음이 들긴 싫으니까요.”

여기까지는 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 배경의 실화를 옮긴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에 나온 수학 천재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Catherine Johnson)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건물의 화장실을 다녀오던 모습을 스케치해 본 겁니다.

“근무지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아침이었어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마음은 늘 급하고, 작은 일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었답니다. 배가 살살 아프더니, 그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빨리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사무실이 있는 40년도 더 됐다는 건물에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3층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건물 사이의 뜰을 지나서는 다른 건물의 2층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밀번호를 해제하고는 두 칸의 화장실 문 앞에 섰지만, 곧바로 자연의 지엄한 부름을 받을 순 없었죠. 다른 분들이 먼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요. 머릿속이 풀다가 꼬인 방정식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어떡할까, 몹시 망설였습니다. 그 건물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의 비밀번호는 모르는 상황이어서 더욱 난감했지요. 아무리 참는다 해도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을 텐데.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데, 다행히도 한 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끝내 물러서지 않을 듯한 먹구름을 헤치고 나온 햇살이 은혜로운 광선(光線)처럼 제 몸을 내리쬐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답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그분이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여기 막혔는데요.'저는 순간 길 잃은 어린 양처럼 되고 말았죠.”

여기까지는 지난달에 제가 경험했던 나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색인종(Colored) 화장실'을 찾아 세차게 내리치는 빗속을 뚫고 달리던 캐서린을 보면서, `직원용(Staff Only) 화장실'을 가느라고 50개가 넘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100여 번의 발걸음을 재촉하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지 뭡니까.

캐서린을 바라보는 마음은 측은했고, 불합리했던 시대의 그저 지나간 얘기처럼 받아들이기엔 불편한 구석이 많았지요.

그게 차별이나 소외, 혹은 어떤 방식의 부당함 문제이든 간에, 숨겨진 것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드리워진 그늘을 걷어냈으면 좋겠습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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