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 삼년산성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 삼년산성
  • 김명철 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4.0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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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 서경중 교감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산성이 존재하고 있다. 고대의 산성은 교통 중심지에 위치하면서 그 지역을 통치하는 거점 역할을 하였고 유사시에는 피난처였다. 보은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기에 신라와 백제가 교통로를 중심으로 쌓은 산성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보은의 오정산 능선을 따라 1.7㎞ 이어진 우리나라 고대 산성을 대표할 만한 소중한 유적이다. 보은을 삼국 시대에 삼년산군이라 불리었다. 행정 구역인 군의 이름이 산성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신라가 삼년산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에게는 최전방 지역이었다. 남진하는 고구려를 막아야 했고 장차 백제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난공불락의 요새 삼년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15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산성은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남아있는 성벽을 보면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 삼년산성을 쌓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현재 성의 정문이었던 서문과 그 주변의 무너진 성벽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찾는 이들에게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삼년산성은 삼국사기에 성을 언제 쌓았는지 분명하게 쓰여 있다. 자비마립간 14년(470)에 3년 동안 성을 쌓았다. 소지마립간 8년(486)에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군) 일대의 장정 3천여 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다. 3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성을 쌓았다는 점과 소지마립간이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성 쌓기를 독려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가 얼마나 공을 들여 삼년산성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긴 백제는 사비(공주)에 이어 웅진(부여)으로 천도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되찾은 한강 유역의 6개 군을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도 삼년산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삼년산성은 백제를 견제하고 공격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몰살당하고 성왕도 전사하였다. 이때 삼년산군에서 파병된 신라군이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 도도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매복하였다가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면서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통일 전쟁에서도 백제 공략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김유신의 5만 정예 병력도 여기서 훈련을 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당의 사신이 황제의 조서를 무열왕에게 전달하러 왔는데, 신라는 삼년산성에서 사신을 맞이했다고 하니 삼년산성의 위세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결국 신라는 이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은 처음 쌓은 이후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철옹성과 같은 요새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가서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 성은 오정산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능선을 따라가며 쌓았는데, 성의 전체 둘레는 1680m이고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13~20m이며 성벽의 폭은 6.6~8m이다. 돌을 쌓은 양은 무려 25만㎥이다. 성벽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여기를 어떻게 쳐들어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번 주말에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철옹성 삼년산성을 두 발로 밟으며 조상의 지혜와 나라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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