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고 지는
꽃, 피고 지는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4.0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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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목련꽃 어느새 툭- 떨어진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봄이 지천인데, 얼마나 부끄럽고 숨 가쁘며, 또한 자랑스러웠던 계절을 견뎌왔던가. 그 사이 떨어지는 목련꽃잎은 여전히 무겁다.

목련꽃은 어쩌다 장렬한 추락을 어김없이 되풀이하는 신세가 되었을까. 등불처럼 봄밤을 하얗게, 혹은 진한 자줏빛으로 밝히더니 커다란 꽃잎 툭-하고 떨어지는 모습은 참담하다.

물기를 잃고 누렇게 떨어지는 목련꽃잎 때문에 가슴이 쿵-했던 울림을 기억하지 못하는 심정은 피폐하다.

봄꽃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다. 매화와 산수유,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과 복사꽃이 차례로 피었다 지는 순서는 이미 전설이 되고….

피고 지는 봄꽃들조차 한꺼번의 설렘과 한꺼번의 상심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며 세월과 청춘을 재촉하고 있다.

꽃에 대해 단연 돋보이는 글을 쓰는 이는 아무래도 소설가 김훈이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 자전거 여행 中> 산수유 꽃에 대한 김훈의 사려 깊은 관찰과 빛과 색의 오묘한 콘트라스트는 절창이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꿈처럼 다가왔다가, 노을처럼 스러지는 황홀함이 그림으로 나타나는 듯 사뭇 처연하다.

김훈은 동백꽃 지는 모습이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거나,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 보라가 되어 사라진다」는 `꽃구름'매화를 일러 「그 죽음은 풍장(風葬)」이라 탄식한다.

꽃을 바라볼 엄두도 없이, 꽃 피고 지는 일을 느낄 여유도 없이 숨 막히는 현대사의 질곡을 우리는 뚫고 지나가고 있다.

누구는 들어가고, 깊고 두려운 바다 속에 숨죽이고 있던 세월호는 참 어이없는 속력으로 떠오르던 날.

새벽 산책길 일제히 고개를 숙인 개나리가 도저히 심상치 않아 고개 들어 보니 허공엔 어느 사이 꽃들이 지천이다. 아니 어떤 꽃들은 이미 서둘러 무너지고 있으니, 세상의 슬픔은 오로지 사람만의 몫은 아니다.

「매화 꽃잎 떨어지는 봄 바다에는, 나고 또 죽은 시간의 가루들이 수억만 개의 물비늘로 반짝이며 명멸을 거듭했다. 사람의 생명 속을 흐르는 시간의 풍경도 저러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봄 바다 위의 그 순결한 시간의 빛들은 사람의 손가락 사이를 다 빠져나가서 사람이 그것을 움켜쥘 수 없을 듯싶었고 그 손댈 수 없는 시간의 바다 위에 꽃잎은 막무가내로 쏟아져 내렸다. 」

<김훈. 자전거 여행 中> 4월의 슬픈 바다는 오래 기억될 것이고 또 길이 기억되어야 한다.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는 꽃처럼, 깊고 무서운 바다 속에 묻었거나 풀릴 수 없는 응어리 되어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4월의 꽃 바다.

우리의 서러움 다시 피었다 지기를 거듭하는 사이 봄꽃은 하마 지천인데, 감추려고 숨기려고 애쓰는 진실은 언제 피어날 것인가. 꽃, 피고 지는. 4월의 찬란한 슬픔은 아무래도 참 오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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