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을 걷다 2
역사 속을 걷다 2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7.04.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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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김시민 장군의 초상화는 그 당시 영의정 당상관 의관을 하고 계시는데 온화하고 어진 모습이 이웃집의 할아버지를 뵙는 듯하다.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다고 한다. 90이 넘은 연세에도 인사동 한 편에서 전시회를 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펼치시던 분이시다.

월전께서는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 임진왜란 때 삼 대첩을 이루신 세분 어른의 영정을 다 그린 분이다. 영정 좌측으로 강희 50년 6월 16일에 선조께서 내리신 교지가 붉은 홍지(중국의 종이)에 쓰여 있고 우측으로는 진주성 촉석루 그림 한 점이 풍경 속으로 나그네를 끌어들이며 400여 년 전의 진주를 생각하게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자국이 통일을 이루었다 하여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호시탐탐 쳐들어올 기회만 엿보다가 급기야는 야밤에 3만여 대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노인과 부녀자까지 군복을 입혀도 삼천칠백여 명이 겨우 될 상황인데 그들은 진주성 주변을 모조리 에워싸고는 장 사다리를 놓고 조총으로 총알을 비 퍼붓듯이 부어대었다. 우리 아군도 비격진천뢰 등으로 반격을 가하고 부녀자들은 큰 돌을 깨어 나르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향하여 돌을 던지도록 도와주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끓는 물을 퍼 날라 물세례로 적을 막으며 성을 지키는데 군관민이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장군의 고향인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가면 장군의 동상이 있고 그 아래 글귀가 쓰여 있다. “나의 남은 세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적을 향한 활을 놓지 않으리라”라고 하신 심정만 보아도 장군께서 이 전투에 얼마나 혼신을 다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셨는지 짐작이 간다.

영정을 모신 충민사 본관 뒤쪽으로 장군의 묘가 있다. 묘 앞쪽으로 400여 년의 세월동안 장군을 지켜 드린 문인석이 홀을 가지런히 쥔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찾아오는 탐방객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역사의 한켠을 지키고 있다.

비석 표면에는 세월의 더께인 듯 버즘처럼 석화가 가득 피어 있는데 이 물질은 식물학 용어로 지의류(地衣類)라고 한다. 이 물질이 1cm 자라는 데는 50년이 걸린다 하니 비록 누더기 옷을 입었을지언정 문인석은 한 백 년을 살면서도 때로는 사네 못사네 하는 우리의 좁은 소견을 부끄럽게 한다.

장군의 묘 앞에 선다. 1592년. 그해 봄에도 바람이 일고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수상하다. 그가 일고 싶은 데로 불지 못하는 것은 도적(盜賊)이 들어와서 불안감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갑자기 그날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겁에 질린 여러 장수가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자 장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맹세하며 호령하기를 `감히 도망하고자 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명령하신다.

성은 함락되고 비록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등 희생되었으나 이긴 것은 침략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조선인의 기백이요 혼(魂)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민족을 지키려는 강렬한 흔적을 남겼으며 그 정신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숭고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조선의 치욕이 아니라 명예이며 전쟁을 예견하고 사전에 준비했던 장군의 전략이 주효했던 전투였으며 장군의 충절정신과 군, 관, 민 일체의 저항의지가 다른 어떤 전투보다 강력했던 것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눈을 감고 장군의 묘소 앞에서 청원해본다. 이 땅에 수많은 후손이 이곳에 와서 장군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머리에 넣어 가슴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감히 빌어본다. 강가에서 세월을 내면으로 새기고 있는 느티나무(槐木)를 바라본다. 혼이 들어 있기에 말을 삼가고 떠나간 선인들을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배웅하듯 엷은 바람에도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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