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단위의 정리
10년 단위의 정리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3.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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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얼마 전 정년퇴직한 교수님이 10년 전에 나에게 말했다.

“나 이제 10년밖에 안 남았어. 할 일 많아. 10년 금세가. 나한테 행정적인 일 시키지 마. 학회회장도 싫어.”

나보다 10년 위지만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비슷한 시기에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자리 잡은 교수님이 한 이야기다.

어쩌다 내가 학회장을 먼저 하게 되어 후임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시간 빼앗기다가는 자기 일 못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이라서, 그분 말씀은 늘 귀에 박혔다. 그런 그가 퇴직했다. 10년이 후다닥 그렇게 지나갔다.

나도 10년이 남지 않았다. `할 일은 많은데, 한 일은 없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아니라 할 일은 많은데 허송세월만 한 셈이다.

내 일본이름이 허송(虛送)에서 따서 `허송'(虛松: 카라미츠)이다. 뒤까지 들으면 더 웃길 것이다. 허송일필(虛松一匹). `서산명동서일필'(西山鳴動鼠一匹)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서산이 흔들리더니 기껏 쥐새끼 한 마리 나오더라'는 뜻이다. 내 인생을 내가 예측했는지, `허송세월하다 너 쥐새끼 한 마리밖에 되지 않더라'라는 뜻에서 만든 이름이다. 공송(空松)도 좋다. 뭐하면, 법명으로 알아주라.

그분이 퇴직기념에 두꺼운 대작을 내놓았다. 평생 열심히 하더니 결과로 감동적인 책이 나왔다. 그래서 물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냐고.

3시 기상, 5시까지 출근, 3시에는 퇴근, 5시 저녁, 8시 취침이란다. 그래도 10시간 근무다. 교수니까 가능한 시간안배라지만, 그런 오기가 있어야 한다.

얼마 전 대단한 저서를 내놓은 다른 교수에게도 하루 일정을 물었다. 퇴직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매일 지하철 첫차 타고 출근, 금요일엔 술 먹고 실컷 자기.

최근 전집이 나온 어떤 철학자의 삶을 물었다. 매일 밤 꼬박 새며 책보거나 글쓰기, 오후 출근, 강의, 저녁 무렵부터 어슬렁거리며 작업.

유학생들이 이런 짓 많이 한다. 밤새워 공부하고 낮에 자기. 그 버릇을 아직도 지키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

나는 몇 년 전 책 쓸 때 그랬다. 저녁밥 먹고 자기. 자정쯤 일어나기. 동터올 때 다시 자기. 9시 출근. 그러니까 합해서는 잘 만큼 자면서 한 권의 책을 냈다. 얼마 전 논문 쓸 때 해봤더니 머리가 무겁다.

공부하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사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수에게 출퇴근시간이 따로 없는 거다.

퇴직제도는 사실 선진국에는 없다. 우리는 정교수가 되면 정년보장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말하는 테뉴어(tenure)는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으면 하라는 것이다. `종신(終身)토록'의 뜻이지, `정년(停年)까지'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교수들에게 종신토록 하라고 하면 누구나 할 것 같아 정년을 두었나 보다. 미국이야 연금도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평가제도가 신랄해서 그냥 붙어 있지 못한다. 내가 미국 있을 때 퇴임식에 가서 그 양반 친한 친구에게 왜 그만두느냐고 했더니 `학생들 평가에 스트레스받아서 못 살겠다'더라.

구미어에서는 10년 단위를 디케이드(decade)라고 독립시켜 말한다.

나의 한 단, 나의 한 묶음, 이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일단 공부부터 하고 볼 일이다. 지난 두, 세 묶음을 정리하고 볼 일이다. 그리고는 앞으로 올 것이 몇 묶음인지 세 볼 일이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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