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임과 사임당
태임과 사임당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7.03.27 2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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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이재경 국장(천안)

은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폭군 주왕은 애첩 달기를 위해 기발한 극형을 개발한다. 그 악명 높았던 포락(통째로 구울 포, 烙)이다. 이 형벌은 구리로 만든 기둥에 기름을 발라 뜨겁게 불로 달궈놓고 깊은 구덩이 사이에 걸쳐놓은 다음 죄수들이 기둥을 기어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기둥 아래 구덩이에는 숯불에 달궈진 쇠꼬챙이가 뜨거움을 참지못해 낙상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해괴한 형벌을 없앤 사람은 바로 훗날 주 문왕으로 불리게 되는 희창(姬昌·BC 1152~ BC 1056)이다. 아들 희발(훗날 주 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하도록 기틀을 다져준 그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성군이다.

주왕의 견제를 받아 유배생활을 하게 된 문왕은 어느 날 주왕이 하사한 곰탕을 먹게 된다. 그 곰탕은 주왕이 인질로 잡아놓았던 문왕의 아들 백읍고를 삶아서 끓인 것이었다. 주왕은 문왕이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인이라면 아들의 고기라는 것을 알 것 아닌갚라며 신하들을 시켜 이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먹지않으면 죽일 심산이었다.

문왕은 훗날을 위해 울분을 삼키며 아들을 삶은 곰탕을 다 먹었다. 죽음을 모면한 문왕은 면회를 온 신하들에게 주왕에게 뇌물을 주도록 했다.

미녀와 명마, 보물을 뇌물로 받은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문왕을 석방하고 그를 서방 제후국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문왕은 한 술 더 떠 주왕에게 자신의 영지를 커다랗게 떼어 바쳤다. 이때 포락형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은나라 충신들이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주왕은 흔쾌히 포락형을 폐지했다.

문왕은 이 덕행으로 또다시 천하의 민심을 얻었으며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제후들이 문왕의 편에 서는 계기가 됐다.

문왕의 성군될 자질은 모친 태임(太任)의 영향을 받았다. 태임은 문왕을 임신한 후 동양 최초로 태교를 실천한 인물로 전해진다. “(임신 중에) 눈은 사악한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은 오만한 말을 하지않았다. 서 있을 때는 발을 헛디디지 않았고, 다닐 때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자리가 바르지않으면 앉지 말고…” 등.

태중의 아기를 위해 직접 몸소 실천할 것을 새겨 날마다 되뇌고 그대로 이행했다. 10개월 후에 태어난 문왕은 요와 순, 은의 탕왕을 잇는 최고의 성군이 되었다.

요즘 SBS 연속극을 통해 다시 조명받고 있는 신사임당은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다. 당호 `사임당(師任堂)'은 바로 태임을 스승으로 본받겠다는 뜻이다.

그의 자녀교육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왔다. 스스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몸소 실천해보였다. 그러면서 자녀들에겐 바르고 행복한 길을 가도록 했다. 참봉 벼슬에 그친 큰 아들, 그림을 그리며 일생을 보낸 넷째 아들과 평범한 집안으로 시집살이를 간 딸들. 셋째(율곡 이이) 말고는 대부분 일류를 거부하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았다.

글을 쓰는 중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통령에서부터 최순실, 김기춘, 안종범, 김종, 최경희, 조윤선 등.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못한 것일까. 아니면 잘 받고도 갑자기 말년에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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