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신호등
적색 신호등
  • 이영숙<시인>
  • 승인 2017.03.2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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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

이 횡단보도 사거리를 몇 달째 지나는 중이다. 대퇴부 골절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살피기 위해 퇴근 전이나 퇴근 후를 이용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이 앞을 지난다.

적색 신호등 앞에 서 있다. 등하교하는 대학생들과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 인근 등산로를 산행하는 등산객들로 이곳은 언제나 번잡하다. 목적지는 서로 다르지만 길을 건너는 사람도 달리는 자동차도 저마다 분주한 걸음이다.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한때는 저들처럼 책가방을 들고 이 길을 건넜고 중년이 되어선 이따금 동료와 등산로를 오르며 깔깔거렸다.

지난해부터 입·퇴원을 반복하는 어머니 때문에 나의 정글만리 독서시간이라는 초록 불도 멈추고 어머니 중심으로 삶의 동선이 단축되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카테고리에서 살아가는 요즘, 삶의 큰 화두는 건강이다. 개미처럼 일해서 평생 모은 그 재산을 노년이 되어 돈 버느라 망가진 그 몸에 다시 쏟아붓고 있다는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패러디는 경종이다.

우리가 켜야 할 신호등은 무슨 색인가? 열심히 활동하다가도 저 적색 불처럼 잠시 멈추고 자신과 주위를 느슨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삶의 목적은 먹는 일만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먹는 일 외의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유 하는 일이다.

1970년대 출간한 리처드 바크의 우화 소설『갈매기의 꿈』은 지금까지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며 사랑받아온 현대인의 필독서이다. 자신의 집단을 벗어나 큰 세상을 꿈꾼 조너선 리빙스턴에게 먹는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일이 아니라 먹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괴짜 갈매기 조너선 리빙스턴에게 중요한 일은 먹는 일보다 나는 일 그 자체였다.' 는 두 줄 문장은 아직도 뇌리에 섬광처럼 번뜩인다. 생의 반 고개를 지나며 `먹는 일'에서 `나는 일'로 발돋움할 무렵 대부분 위기를 맞는다.

이제 먹는 일에서 벗어나 좀 살만하니까 몸이 고장 났다며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 자신에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한 번만 더 주어진다면 자식들 손잡고 산꼭대기에 올라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고 하신다.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허리 한 번 못 펴고 개미처럼 살아오신 어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은 세상은 산 아래의 드넓은 세상이다. 자식이라는 울에 갇혀 그 단순한 소망 한 번 펼치지 못한 어머니는 바로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대표적인 모습일 것이다.

초록 불이 들어온다. 어머니에게 드릴 해독주스와 밑반찬이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길을 건너는데 몸이 휘청거린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평생을 이렇듯 몸 무겁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길 건너 땅콩 빵을 굽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 땅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내가 성공을 했다면, 오직 천사와 같은 어머니의 덕이라고 한 에이브라함 링컨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병든 몸이 되어서야 자식들의 직간접 보살핌을 받는 어머니,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자식들 손잡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야유회 한 번 못 해드린 회한이 남는다. 오늘도 어머니 인생에 1분 남짓한 초록 불을 켜 드리기 위해 이 길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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