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비밀
꽃의 비밀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3.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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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나무의 사계를 지켜보고 있으면 숙연해진다. 잎눈을 여느라 안간힘을 하는 봄. 잎의 무성을 위해 수액을 빨아올리는 쉼도 없는 여름. 색색의 단풍 옷으로 변장하는 가을. 또한 영하의 추위에 맞서 싸우지 않고 고개를 수그릴 줄도 안다. 분신 같은 잎을 다 떨구고 나신으로 겨울을 견디는 인내도 있다. 나에게는 이들이 현자(賢者)다.

나무의 눈꽃 위로 산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은사시나무가 유난히 하얀색이 될 즈음이면 봉오리를 벌리는 과감한 꽃이다. 서서히 부풀리며 꽃잎을 피울 때를 기다린다. 벌도 나비도 없는 겨울에 개화하는 데는 자기만의 고집이 있어서다. 유난히도 자신을 좋아하는 동박새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동박새는 달콤한 꿀을 먹으러 왔을 뿐이다. 새의 부리로 스치고 지나가면 꽃은 그때부터 환하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추위는 방해되지 않는다. 한 번의 입맞춤으로 제 몸을 불사르듯이 붉게 타오른다. 자신의 배를 불린 새는 꽃에는 관심이 없다. 빨갛게 피워내는 모습을 지켜보아 주지 않는다. 유혹을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는 동박새를 향해 꽃은 화려하게 색을 펼치는 것이다. 이 꽃은 지기 직전에 가장 붉게 타오른다. 가지에 매달린 채 시들어가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 장 한 장 꽃잎이 말라가면서 낙화하기보다 끝까지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한창 고운 모습일 때 송이째 미련을 두지 않고 떨어뜨린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듯이 툭툭 떨어진다. 이 모습을 보고 임을 떠나보내는 눈물방울이라고 했던가.

땅 위에 떨어진 꽃들은 다시 빨갛게 피어난다. 이토록 자신을 두 번이나 달아오르게 한 동박새를 본 적이 없다. 꽃눈이 닫혀서 볼 수가 없었고 눈을 떠서 보려 할 때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정작 새는 동백에게 온몸이 떨리는 터치였음을 모르는가 보다. 그리하여 매혹적인 꽃이 되었음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동백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많이 비유된다.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을 동백꽃 사랑이라고 말한다. 둘은 시인으로 유부남과 미망인의 만남이다. 이들은 20년 동안 날마다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이영도에게 보낸 글 속의 한 구절이다. 유부남인 청마와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기에 더 애절했을 터이다. 그러다가 그가 자기를 만나러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 소식을 들은 그녀의 눈물이, 울음은 아마도 피를 토해내는 아픔이었으리라.

나는 오래전에 오동도의 동백 숲에서 보았다. 자기를 흔들어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핏빛 연서를 땅에 풀어내고 있음을. 기다림에 지쳐 실망하여 고개를 떨굼을. 하 서러워 토해내는 오열이었다. 동박새가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꽃의 처절한 몸짓으로 보였다. 그래서인가. “그 누구보다도 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푸른 잎을 단 사철나무인 줄 알았던 동백에게 꽃이게 해준 동박새. 그를 기다리며 땅 위에 풀어놓는 꽃송이의 선홍빛 바다. 그건 차라리 절박한 그리움을 쏟아내는 여인의 각혈이다.

오롯이 저 혼자 가슴을 사르는 때늦은 동백이 있다. 조매화(鳥媒花)인 이 꽃에 새는 온 적, 간 적이 없다. 어찌하여 열이 들끓고 펄펄 앓는지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건들고 갔다고 바람결이 전해줄 뿐이다. 휘휘 가버린 바람은 동백의 숨 멎는 떨림을 알아차렸을까. 곱씹은 노을빛 연정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 이건 분명 외도다.

“쉿, 꽃의 비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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